우주항공청(KASA)에서 연구·개발(R&D)를 총괄하고 있는 ‘우주 사령탑’ 존 리 우주항공임무본부장이 지난 5개월 동안 접촉한 기업과 통신 내역, 월급 등 활동 내역을 미국 법무부에 소상하게 보고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나사(NASA·미 항공우주국) 고위직 출신인 리 본부장이 한국계 미국인이고, 미국은 자국민이 외국 정부를 위해 일할 경우 외국대리인등록법(FARA)에 따라 ‘외국 대리인(foreign agent)’으로 등록해 활동 내역을 주기적으로 신고하도록 돼 있기 때문이다. 이 정보는 누구나 열람이 가능한데, 주요국 우주 행정이 이렇게까지 낱낱이 공개되는 경우는 전례를 찾기 힘들다.
리 본부장이 법무부에 신고해 지난 20일 공개된 내역을 보면 2월 25일부터 7월 25일까지 10만9130달러(약 1억5110만원)를 급여로 수령했다. 이 기간 자신의 업무에 대해 “항공임무본부장으로서 여러 기업의 사람들과 소통했다”고 했는데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의 스페이스X, 제프 베이조스의 블루 오리진을 비롯해 글로벌 방산 메이커인 록히드 마틴·노스럽 그루먼, 악시옴, 시에라 스페이스, 보이저 스페이스 등 그가 접촉한 25개 기업 목록이 적시돼 있다. 리 본부장은 또 “우주항공청과 NASA, 미 해양대기청(NOAA) 간 협력 목적의 의사소통”이라며 미 정부 인사들과 접촉하고 연락을 주고 받은 내역 약 50건도 신고했다.
주요 신고 내용을 보면 지난 2월 6일 미 우주군 한국 사령관인 존 패트릭 대령이 경남 사천의 우주항공청 본부를 방문했고, 하루 뒤엔 조이 사쿠라이 당시 주한 미국 대사관 차석대사와 대면으로 만남을 가졌다. 4월 8일에는 콜로라도주(州) 콜로라도 스프링스에서 열린 ‘스페이스 심포지엄’에 참석했는데 여기서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아르테미스 프로젝트’ 협력 등을 위해 캐런 펠드스타인 NASA 부청장, 바네사 위치 부청장 대행, 트레이 칼슨 존 F. 케네디 우주센터 센터장 등과 만났다고 돼 있다. 이밖에 4월 11일 NASA 프로그램 과학자인 아릭 포스너와 오찬을 같이하고, 6월 7일엔 한국 주도로 L4(지구와 태양의 중력 균형 지점)에 관측 위성을 보내는 프로젝트 상황에 대해 문자로 문의한 것까지 신고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워싱턴 DC의 한반도 전문가인 수미 테리 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이 우리 정부를 위해 활동한 혐의로 기소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미 당국은 최근 들어 우방·적성국 인사 할 것 없이 FARA법을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는 추세다. 이런 기조에 맞춰 리 본부장도 대면 접촉은 물론 단순한 문자·메일 내역까지 세세하게 신고한 것인데, 한국 정도 되는 나라의 주요국 우주 행정과 고위직 활동 내역이 이렇게 낱낱이 외부에 공개되는 것은 전례를 찾기 힘든 일이다. 리 본부장 바로 밑에서 일하는 김현대 항공혁신부문장 역시 나사 출신 한국계 미국인이라 미 법무부에 6개월 단위로 활동 내역을 보고하고 있다. 우주항공청은 “기밀 유출 우려가 없도록 관리를 하고 있다”는 입장이지만, 미국과 달리 국내에는 다른 나라 정부의 이익을 위해 우리 국회나 정부를 상대로 홍보·정치 활동을 하는 경우 이를 관리할 제도가 없는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생성형 인공지능(AI)의 발달로 허위 정보 유포와 여론 조작이 갈 수록 더 쉬워지고 있는 만큼, 외국의 대규모 영향력 공작(influence operations)을 차단하기 위해 FARA와 유사한 법 제정을 포함한 여러 조치를 고민해 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한 전직 고위 당국자는 “중국이나 러시아 같으면 미국이 자국의 조력자를 처벌하려 할 때 자신들도 자국 내 미국의 조력자를 찾아내 비슷한 조치를 취했을 것”이라며 “한국이 동맹인 미국에 ‘팃포탯(tit for tat·맞대응)’ 전략을 쓸 수는 없지만 이런 문제에 대해 하나의 국가로서 아무런 ‘카드’를 갖고 있지 못한 현실은 개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 외국 대리인 등록법(FARA)
‘Foreign Agents Registration Act’의 준말. 외국인을 포함해 미국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이 외국 정부·기관·기업 등의 정책 및 이익을 위해 일할 경우 미 법무부에 신고하고 활동도 보고하도록 하는 연방 법이다. 미 정부 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활동을 투명하게 파악하겠다는 취지로 제정돼 1938년부터 시행되고 있다. 최근엔 적용 범위가 지나치게 광범위하고 모호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