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우크라이나 하르키우에서 주민들이 월드 센트럴 키친이 제공하는 음식을 받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지난주 가자지구에 머물다가 어젯밤에서야 돌아왔어요. 우리의 모든 에너지와 집중력을 목표 달성, 활동가들의 안전한 귀환에 쏟다 보니 그야말로 기진맥진한 상태예요. 만해평화대상 같은 영예로운 상을 받을 수 있어 대단히 영광입니다.”

19일 미국 워싱턴 DC에 본부를 두고 있는 비영리단체 ‘월드 센트럴 키친(WCK)’ 관계자는 본지에 이렇게 말했다. 스페인 출신의 성공한 셰프이자 글로벌 식량 문제 해결에 앞장서 온 요리사 호세 안드레스(56)가 2010년 설립한 WCK는 전쟁, 허리케인, 지진 등 최악의 재난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따뜻한 식사 한 끼를 제공해 위로와 희망을 준다는 미션을 갖고 있다. “음식은 단순한 생존이 아닌 인간의 존엄과 공동체를 지키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2023년 10월 전쟁 발발 이후 기아와 영양실조가 심각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도 WCK의 활동 무대 중 한 곳이다. 지난해 4월 이스라엘군의 오폭(誤爆)으로 소속 활동가 7명이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지만 인도주의적 위기 앞에서 이를 외면할 수 없었다.

WCK는 안드레스가 2010년 아이티 대지진 참사 당시 자원봉사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만들어졌다. 가자지구를 비롯해 우크라이나·니카라과·캄보디아·페루 등 60국 이상에서 활동을 펼쳤는데, 기성 구호단체들이 건조 식량이나 보존 식품을 나눠 줬던 것과 달리 따뜻한 조리 음식을 현장에서 제공하는 방식을 추구했다. 재난이 발생하면 현지 재료·인력을 최대한 활용해 신속하게 음식을 제공한다. 세계 곳곳에 자원봉사자와 협력이 가능한 현지 단체들이 있어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고 있다고 한다. 가자지구 전쟁 발발 이후 거기로 들어가 1억 4500만끼 이상의 식사를 제공했고, WCK의 노력으로 개설된 해상 통로를 따라 폐허가 된 가자지구에 인도적 물품 수백 톤이 지원됐다. 미 시사 주간지 타임은 지난해 5월 WCK를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대 회사’ 중 하나로 선정했다.

호세 안드레스 월드 센트럴 키친 창립자. /페이스북

WCK는 지난해 4월 1일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습 당시 군 오폭으로 활동가 7명이 사망하며 다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당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사석에서 크게 분노했고, 항의를 받은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이례적으로 특별 성명까지 발표하며 오폭을 인정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바이든은 사건 이튿날 자신이 평소 ‘친구’라 부르는 안드레스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위로를 전했다. 안드레스는 X(옛 트위터)에 숨진 활동가의 생전 모습이 담긴 영상을 공유하며 “이 일을 하지 않아서 당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사람처럼 웃고 있었을 텐데 너무 미안하다”고 말해 보는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WCK는 우크라이나에서도 2022년 전쟁 발발 직후 우크라이나와 폴란드 국경에 부엌 8개를 연 것을 시작으로 200여 도시에서 식량 배급망을 구축해 2억6000만끼 이상을 제공했다. 단순히 피란민을 대상으로 하는 식사 제공에 그치지 않고 채소 종자 배급 사업 등을 통해 무너진 농업 인프라를 복원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좀처럼 구호단체의 지원 손길이 닿지 못하던 최전선 하르키우 같은 도시에도 활동가들이 목숨을 걸고 들어가 푸드 키트를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밖에 자연재해가 잦고 내정이 불안정한 카리브해·중앙아메리카에선 식량 문제에 대한 장기적 해결책을 모색하는 ‘회복력 프로그램’에 집중하고 있다. 지역사회가 장작·석탄을 연료로 하는 모닥불을 이용한 요리에서 탈피하도록 교육하고, 요리 학교를 세워 미래의 셰프를 길러내는 것이 대표적이다. 안드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의료 서비스가 필요하면 의사와 간호사를 부른다. 건물을 다시 지으려면 엔지니어와 건축가를 부른다. 사람들을 먹이고 배고픔을 해결하려면? 우린 전문적인 셰프가 필요하다.”

안드레스는 뉴욕·라스베이거스 등에 20여 레스토랑을 소유했고, 세계적 미식 안내서인 ‘미쉐린 가이드’에서 별 2개를 받기도 했다. 사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요리사지만, “특별한 사람을 위한 요리보다 많은 사람을 배부르게 하는 요리가 좋다”는 그의 지론에서 비롯된 자선 사업은 음식에 관한 미국 엘리트의 인식을 크게 바꿔놨다는 평가를 받는다. 안드레스의 뜻에 공감한 질 바이든 여사, 카멀라 해리스 전 부통령 부부 등 진보 진영의 주요 인사들이 WCK의 자선 행사에 종종 얼굴을 비치며 힘을 보탰다. 낸시 펠로시 전 연방 하원 의장은 2019년 안드레스를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했고,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국가 인문학 훈장’을 수여했다. 액시오스는 “워싱턴 파워 서클 한가운데 진보 진영 거물들에게 두루 존경을 받은 성인(聖人) 같은 요리사 안드레스가 있다”며 “그가 말하면 워싱턴이 귀를 기울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