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은 31일 한국과 “또 다른 역사적인 무역 합의에 이르렀다”며 소셜미디어 계정을 통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우리 협상단이 찍은 단체 사진을 공개했다. 백악관은 한국이 미국에 3500억 달러(약 488조 6000억원)를 투자하기로 했고, 액화천연가스(LNG) 및 다른 에너지 제품 1000억달러어치를 구매하기로 한 것을 재차 언급하며 “미국산 제품에는 아무 관세도 없이 완벽하게 무역을 개방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한국이 트럼프가 제시한 상호 관세 부과 유예 시한인 8월 1일 이틀 전 극적인 합의를 이뤘지만, 팩트시트를 발표하기까지 디테일을 놓고 이견 차를 좁혀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다.

백악관이 이날 공개한 단체 사진을 보면 파란색 넥타이를 맨 트럼프가 가운데서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며 웃고 있다. 미국 측에서는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 제이미슨 그리어 무역대표부(USTR) 대표 등이 참석했다. 한국 측에서는 협상단장인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지난달부터 이번 한미 간 협의의 디테일을 챙긴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 최지영 기재부 국제경제관리관(차관보) 등이 배석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이 촬영된 곳은 웨스트 윙의 캐비닛 룸으로 트럼프가 평소 여기서 내각 회의를 주재한다. 뒤편에는 에이브러햄 링컨 전 대통령이 율리시스 S. 그랜트 장군 등과 회의를 하는 그림이 걸려 있다. 우리 협상단은 약 40분 동안 트럼프와 면담을 했는데, 협상단이 백악관을 빠져나가자 트럼프는 자신의 소셜미디어인 ‘트루스 소셜’에서 합의 소식을 알렸다.

이번 합의를 통해 한국은 트럼프가 주도하는 ‘관세 전쟁’의 한 고비를 넘겼지만, 한미 간에 말이 다른 부분이 있어 디테일의 간극을 줄이는 게 중요한 과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백악관이 이른바 ‘팩트시트’라 불리는 공식 문서를 발표하기 전까지 문안을 놓고 한미 간에 크고 작은 실랑이가 계속될 수 있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트럼프는 우리가 투자하기로 한 3500억 달러와 관련해 “(프로젝트가) 나에 의해 선택이 될 것”이라 했는데 이를 어떻게 문안으로 구현할지가 관심거리다. 미국과 일본이 체결에 합의한 문서를 보면 “트럼프의 지시 아래(Under the Trump’s direction)”라고 돼 있다. 트럼프가 LNG 외 추가 투자 액수를 곧 있을 이재명 대통령과의 양자(兩者) 회담에서 확정 짓겠다고 밝혔기 때문에 한국의 대미(對美) 투자 액수가 지금보다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한미 간에 이견 차가 컸던 농산물 개방을 놓고도 트럼프가 ‘완전 개방’을 발표한 반면, 구 부총리는 “추가 시장 개방은 하지 않는 것으로 합의했다”고 했다. 쌀·소고기 시장은 지켰지만 향후 미측의 요구대로 미국산 농·축산물에 대한 검역 기준이 완화되면 농업계의 반발이 일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왼쪽부터)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 회장. /뉴스1

이번 합의 과정에선 우리 기업들의 역할이 상당했는데 특히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필두로 정의선 현대차 회장,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이 직접 워싱턴 DC로 날아와 한미 간 고위급 만남을 주선하고 대미 투자 계획 등에 힘을 실은 것으로 알려졌다. 기업 총수들이 뛰니 지지부진하던 협상에 그제야 물꼬가 터졌다고 한다. 취임 사흘 만에 대미 협상 테이블에 투입된 김정관 산업부 장관은 30일 브리핑에서 기업인들의 구체적인 역할을 묻는 질문에 “그 부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했다. 이런 가운데 이재명 정부와 여당은 대미 투자 일선에서 뛰어야 할 우리 기업들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각종 입법을 추진하고 있다. 또 구 부총리는 근래에 재임한 경제 부처 수장 중에서는 이례적으로 법인세 인상을 찬성하고 나섰는데, 구 부총리가 한미 협의 결과를 브리핑한 이날 삼성전자는 영업이익이 반 토막이 났다고 발표했다.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등을 지낸 김건 국민의힘 의원은 “유예 종료 시한을 목전에 두고 협상이 타결된 것은 다행”이라면서도 “협상의 악마는 항상 세부 사항에 숨어 있기 때문에 자화자찬하기에는 이르다”고 했다.

빅터 차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한국석좌는 이날 논평에서 “한국 측은 쌀과 소고기 두 가지 모두에서 양보를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트럼프는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더 많은 농산물을 구매한다고 약속했다고 게시했다”며 “또한 미국이 한국으로부터 월령 30개월 이상 소고기 수입 금지 조치 철회를 약속받았는지 여부가 불분명하다”고 했다. 또 곧 있을 한미 정상회담 관련 “트럼프는 단순히 무역 협정을 축하하려는 자리로만 활용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투자, 비(非)관세 장벽, 통화 조작 등 무역과는 관련이 없지만 연결된 문제들이 논의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USTR 부대표를 지낸 웬디 커틀러 아시아소사이어티정책연구소(ASPI) 부소장은 “한국은 철강과 반도체라는 두 개의 우선적인 분야와 관련해 더 낮은 관세율을 얻지 못했다”며 “이번 협정은 한미가 상호 관세를 거의 모두 철폐한 양자 간 한미무역협정(FTA)의 가치를 무효화하는 것이다. 한국은 FTA 파트너지만 유감스럽게도 특별한 대우를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