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루비오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건 조금 모욕적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모두 그의 친구 아닙니까? 나는 그에게 큰 신뢰를 갖고 있어요.”
18일 미국 콜로라도주(州) 애스펀에서 열린 ‘애스펀안보포럼’에서 콘돌리자 라이스 전 국무장관(현 애스펀전략그룹 공동 의장)이 이렇게 말하며 다소 불편하다는 듯한 기색을 내비쳤다. 사회자가 “우리는 진짜 마코 루비오를 보고 있지 않다”는 크리스 쿤스·마크 워너 민주당 상원의원의 발언을 인용하며 패널들에게 묻자 이렇게 답한 것이다. 여기서 ‘진짜 루비오’는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이 상원 외교위원회 시절 미국이 가치·규범을 앞세워 세계 곳곳의 문제에 관여해야 한다는 공화당 정통의 외교·안보 노선을 추구했던 ‘소신’에서 벗어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매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노선에 영합하고 있다는 것을 비꼬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15일부터 이날까지 계속된 애스펀안보포럼에선 ‘대외 문제 앞에 여야 없다’는 기조에 맞게 패널 토론에서 별다른 논쟁이 벌어지지 않았지만, 18일 마지막 세션은 “양념이 더해졌다”(폴리티코)는 평가가 나왔을 정도로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포문을 연 것은 바이든 정부에서 안보 수장을 지낸 ‘외교 수재’ 제이크 설리번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었다. 트럼프 정부가 60년 넘게 대외 원조를 담당했던 국제개발처(USAID)를 사실상 폐지한 것을 비판하며 “나는 미국의 소프트파워인 외국 원조가 극히 중요하다 믿는다” “중국이 거의 모든 분야에서 미국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들어오고 있다”고 했다. 설리번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USAID 창설 당시 했던 연설까지 인용해가며 “개혁이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실질적으로 책임감 있게 이뤄져야 한다”며 “지난 몇 달 동안 이 나라에 인생을 바친 공직자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했다.
설리번의 이 같은 발언은 라이스가 루비오의 첫 6개월 행보에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며 “국무부 개혁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말한 직후 나왔다. 설리번은 매가가 접수한 국무부에서 직업 외교관 출신들이 대량 해고된 것과 관련해 “이 나라를 위해 봉사한 사람들을 존중해야 한다”며 “그들이 나쁘고 악하고 게으르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그러자 라이스는 “나는 그들을 존중하며 살아왔다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설리번이 “(라이스 당신에 대한) 비판이 아니었다”고 하자 라이스는 “말씀을 마치게 해달라”고 받아쳤다. 그러면서 “국무부는 가장 우수하고 뛰어난 인재들로 구성돼 있지만 지난 몇 년 간 대외 원조 분야에서 진행한 일부 정책은 미국의 이익과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었다”고 했다.
라이스는 “우리가 지출하는 외교 예산, 외국 원조 예산이 실제로 어디에 쓰이는지를 검토하는 건 예전부터 필요했던 일”이라며 “현재의 진행 방식이 마음에 안 들지만 많은 미국 국민은 ‘왜 원조 프로그램을 수십 년 동안 운영해왔는데 수혜국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하냐’고 묻고 있다”고 지적했다. 부시 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내며 ‘철의 여인’이라 불렸던 그는 한 일화를 소개했는데, 재임 중 불가리아 대통령에게 보낸 ‘미국과의 우정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란다’는 생일 축하 메시지를 10명이나 검토했다며 “두 개의 전쟁을 치르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국무부 개혁을 시도했을 것”이라고 했다. 라이스는 루비오가 ‘외교 거목(巨木)’인 헨리 키신저 이후 국무장관·국가안보보좌관이란 ‘모자’를 두 개나 쓴 것에 대해서도 “집무실이 오벌 오피스(백악관의 대통령 집무실)와 가깝다면 좋은 일”이라며 긍정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 ☞애스펀연구소(Aspen Institute)
미국의 사업가인 월터 펩키가 1949년 콜로라도주 애스펀에 설립한 비영리단체다. 시카고 출신으로 애스펀의 자연경관에 감동한 펩키가 세계의 리더들이 일상에서 벗어나 토론을 하는 아이디어를 구상한 것에서 비롯됐다. “대화와 리더십을 통해 미국과 전 세계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도전 과제들을 해결하겠다”는 것이 운영 취지다. 정치 구도에서 한 발짝 물러나 다양한 사람이 모여서 토론하도록 주선하는 초당적 주관자를 지향한다. 경제·교육·환경 등 30여 분야에서 각 프로그램이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2010년부터는 매년 전 세계 외교·안보 전문가들이 국내외 문제를 논의하는 ‘애스펀안보포럼’을 개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