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에는 국물 냄새가 가득하고 사람들이 바글바글거려요. 식당 주방에선 아주머니들이 밤늦게까지 정말 열심히 일하죠. 그 근면함 때문에 지금 한국, 한국인이 전 세계에서 사랑받죠. 이건 그냥 음식이 아니라 한국 문화를 상징하는 것과 같아요.”
17일 미국 콜로라도주(州) 애스펀에서 열린 ‘애스펀안보포럼’ 현장에서 만난 스티브 비건 전 국무부 부장관은 꽤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이 얼마나 진심으로 ‘닭한마리’를 사랑하는지에 대한 예찬론을 늘어놨다. 비건은 트럼프 정부 1기 때 대북정책 특별대표로 있으면서 싱가포르,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두 차례 미·북 정상회담에 관여했다. 미·북 대화가 탄력을 받던 시기라 비건의 일거수일투족이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는데, 그가 한국 대중에 유명해지게 된 계기는 따로 있었다. 2019년 2월 8일 평양에서 돌아온 뒤 지친 몸을 이끌고 찾은 광화문의 닭한마리 식당에서 닭다리를 든 사진이 찍혔고, 이게 조선일보 1면에 실려 외교가에서 큰 화제가 됐기 때문이다.
비건은 “그날 평양에서 돌아온 나와 동료들은 저녁도 못 먹고 굶주려 있는 상태였다”고 했다. 광화문의 포시즌스 호텔에 체크인을 한 게 오후 11시쯤이었는데 시간이 너무 늦어 호텔 식당은 문을 닫은 상태였고, 컨시어지에서 “길 건너편에 있는 닭한마리 식당에 가보라”는 추천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비건을 쫓던 대부분의 언론이 현장에서 철수한 상태였는데 이 늦은 저녁 식사가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본지에 포착됐다. 결국 닭한마리를 들고 사진을 찍는 것으로 ‘합의’가 됐는데 비건은 “그 기자는 매우 예의가 바른 신사였고, 우리 일행끼리는 내가 한반도에서 한 유일하게 성공한 협상이라는 말을 농담처럼 했다”며 웃었다. 이 사진 한 장으로 닭한마리는 트럼프의 대북 메신저였던 비건을 상징하는 것이 됐다. 과거 토니 블링컨 전 국무장관 등도 순두부찌개집을 즐겨 찾은 것이 화제가 됐지만, 음식 하나로 한국 대중에 이 정도로 임팩트를 남긴 미 외교관은 그가 유일하다.
비건은 이후로도 여러 차례 닭한마리 식당을 찾았는데, 단골로 동행한 게 현재 국무부 서열 3위인 앨리슨 후커 정무 담당 차관이다. 비건 일행이 갈 때마다 손님들이 알아봐 사진 촬영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 “식당 측에서 미국에 가서 요리를 해 먹을 수 있도록 레시피는 물론 향신료가 들어간 가방까지 선물했다”고 했다. 비건은 “내가 살고 있는 워싱턴 DC 인근에 한국 식료품점이 있지만 그냥 가서 구하려면 어려웠을 텐데, 식당 아주머니들이 친절하게도 향신료 이름을 영어가 아닌 한글로 써서 가방에 담아줬다”며 “그 아주머니들은 밤늦게까지 주방에서 열심히 일했다. 그 친절함·근면성은 한국 음식과 한국인들이 지금 왜 전 세계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 같다”고 했다. 코로나로 한미를 오가기 어려웠을 땐 앞치마를 매고 가족을 위해 닭한마리를 직접 요리했는데 “모든 연결이 끊긴 어두웠던 시기에 큰 행복이자 위로가 됐다”고 했다.
비건은 부장관 임기를 마친 뒤 2023년 4월 다국적 항공우주기업 보잉에 부사장으로 합류해 최근까지 일했고, 현재는 민주주의진흥재단(NED)의 이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가 닭한마리 식당을 찾은 건 지난 2023년이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그 뒤로 이 식당을 찾은 대사관과 국무부의 무수히 많은 동료들이 그에게 방문을 인증하는 사진을 보냈다고 한다. 식당 입구에 본지 1면과 함께 비건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있다. 비건은 “일주일 전에도 국무부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가 한국 정부와의 양자(兩者) 협의를 위해 서울에 갔다가 식당 입구에 있는 내 사진을 보냈다”며 “서울로 돌아가면 다시 그 식당을 찾아갈 것이다. 나는 아직 그 맛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