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일 전용기 안에서 기자들과 만나 질문에 답변을 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자신의 대선 맞상대였던 민주당 후보 카멀라 해리스 전 부통령의 인터뷰를 방송했던 지상파 방송사 CBS로부터 1600만달러(약 217억4000만원)를 받게 됐다고 미 언론들이 2일 보도했다. 지난해 11월 대선을 앞두고 CBS가 해리스 인터뷰를 방영하면서 해리스 쪽에 유리하게 편집해 자신이 피해를 입었다며 200억달러(약 27조2000억원)를 물어내라는 소송을 걸었는데 CBS의 모기업 파라마운트로부터 1600만달러를 받는 것으로 합의하며 종결된 것이다. CBS는 트럼프 요구대로 TV에 방영되지 않은 부분을 포함한 인터뷰 녹취록 전문을 추후 공개하되 방송사 차원의 공식 사과나 유감 표명은 하지 않기로 했다. 지급액 중 변호사·소송 비용을 제외한 금액은 향후 지어질 트럼프 기념 도서관 건립 기금으로 쓰이게 된다.

이번 소송을 냈을 때 트럼프가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미국 법원은 표현의 자유를 적시한 수정헌법 1조를 근거로 언론 보도의 자율성을 폭넓게 보장해 온 데다, 문제가 된 인터뷰는 트럼프의 인터뷰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액의 합의금 지급으로 사안이 마무리되면서 회사 명운이 걸린 방송사 측이 최고 권력에 굴복했다는 비판이 잇따르고 있다. 파라마운트는 현재 인수 합병 절차를 진행 중인데 인허가권을 연방 정부 기관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대선을 코앞에 둔 지난해 10월 CBS가 간판 시사 프로 ‘60분’을 통해 해리스의 인터뷰를 방영하자 트럼프는 “CBS가 민주당에 유리하게 선거 결과를 조작하기 위해 인터뷰를 사기로 편집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연방법원에 파라마운트를 상대로 200억달러 규모 소송을 냈다.

트럼프가 문제 삼은 부분은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관련된 부분이다. 해리스가 네타냐후와 이스라엘 정세에 관한 질문을 받고 답변하는 부분은 예고편에서는 21초, 본방송에서는 7초가량 방영됐다. 트럼프 측은 이를 문제 삼으며 “길고 장황한 해리스의 답변을 그대로 내보내지 않아 해리스가 똑똑하게 보였다”고 주장했다. 방송사 측이 특정 후보를 위해 편향된 방향으로 편집을 했다는 것이다. 트럼프의 주장에 CBS는 보도 과정에는 문제가 없다고 일관되게 맞섰다. 하지만 트럼프는 대선에서 승리해서 백악관에 재입성한 뒤에도 소송을 이어가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새로 출범한 트럼프 2기 정부와의 갈등을 부담스러워한 경영진이 합의로 소송을 끝내는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회사 내부적인 사정도 고려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할리우드 제작사 스카이댄스가 파라마운트를 인수해 미 당국의 합병 승인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트럼프 재집권 이후 미디어 기업들의 인수·합병 인허가권을 쥔 연방통신위원회(FCC) 위원장에 트럼프 지지자인 브렌던 카가 임명됐다. CBS의 앞날을 결정할 칼자루를 트럼프의 측근이 쥐게 된 것이다. 이에 파라마운트의 오너인 샤리 레드스톤 회장의 주도로 합의금 종결 방안이 추진됐다. 이런 접근 방식에 대해 CBS 기자들이 집단 반발했고, ’60분’의 총괄 프로듀서 빌 오웬스와 웬디 맥맨 CBS 사장이 물러나는 등 내홍으로 이어졌다.

“파라마운트가 트럼프에게 굴복하는 것은 언론의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라며 합의하지 말아야 한다는 정치권과 시민사회의 요구도 잇따랐다. “오보를 낸 것도 아닌데 거액을 지급하는 것은 권력과 언론의 관계에 있어서 잘못된 선례를 남길 수 있다”는 우려도 일었다. 대표적인 진보 정치인인 엘리자베스 워런(민주당)·버니 샌더스(무소속) 연방 상원의원은 의회 청문회까지 예고하며 “파라마운트가 트럼프에게 지급하는 금액도 뇌물로 해석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번 합의가 방송 저널리즘의 명가(名家) CBS의 역사에 오점을 남길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CBS는 월터 크롱카이트 등 전설적 앵커들을 배출했고,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베트남 전쟁, 달 착륙 등 미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의 보도에서 경쟁 방송사인 ABC와 NBC를 압도했다. 뉴욕타임스는 이번 합의를 “주요 언론사가 현직 대통령에게 한 전례 없는 양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