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미국 워싱턴 DC 북서부에 있는 주미 이스라엘 대사관 주변에 철제 펜스와 폴리스 라인이 설치돼 있다. /워싱턴=김은중 특파원

22일 찾은 미국 워싱턴 DC 북서부 주미 이스라엘 대사관 일대에선 경찰이 삼엄한 경계 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대사관 근방에는 철제 펜스와 함께 노란색 폴리스 라인이 설치됐고, 앞을 서성이면 경찰이 다가와 “무슨 일로 찾아왔느냐”고 물었다. 전날 수도 한복판에 있는 유대인 박물관에서 대사관 직원 2명이 총격을 받아 사망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보였는데, 이날 대사관 직원 상당수는 출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법무부는 이날 시카고 출신의 엘리아스 로드리게스를 1급 살인, 외국 공무원 살해, 폭력 범죄 중 총기 사용 등의 혐의로 기소했다.

미 연방수사국(FBI)은 이번 사건을 반유대주의 범죄로 규정했다. 캐시 파텔 FBI 국장은 “반유대주의 폭력은 우리 핵심 가치에 대한 공격”이라며 “연방 기관들이 모든 힘을 동원해 대응할 것”이라고 했다. 연방 요원들이 로드리게스의 시카고 자택을 습격한 지 반나절 만에 혐의가 발표됐고, 파텔은 이번 사건을 ‘테러’로 규정했다. 로드리게스는 전날 보안 요원들에게 체포된 직후 “팔레스타인과 가자를 위해 그랬다” “나는 비무장 상태”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 “총격이 있은 지 1시간도 되지 않아 그의 소셜미디어엔 가자 전쟁을 규탄하는 예약 게시물이 올라왔다”고 뉴욕타임스(NYT)는 전했다. 로드리게스는 과거 여러 차례 친(親)팔레스타인 집회 참여 경력이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로드리게스는 시카고에서 자라 일리노이대를 졸업했고, 의료 비영리 단체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현장에서 9mm 권총을 들고 있었는데 당국은 “합법적으로 총기를 소지하고 있었으며 워싱턴 DC로 비행기를 타고 올 때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번 총격 사건의 희생자는 이스라엘 대사관에 근무하고 있는 이스라엘 출신 야론 리친스키(30)와 캔자스주(州) 출신의 사라 밀그림(26) 등 두 명이다. 약혼을 앞두고 있던 상태였고, 다음 주 리친스키가 프로포즈를 하기 위해 반지를 구매했던 사실이 알려져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두 사람이 유대인과 아랍인의 교류를 도모하기 위해 활동을 했다는 지인들의 증언도 나왔다. 이스라엘 대사관은 공식 계정에서 두 사람의 사진을 올리며 “야론과 사라는 우리의 친구이자 동료로 인생의 전성기를 맞고 있었다”며 “대사관 직원 전원이 비통함에 빠져있고, 우리의 공포는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고 했다.

주미 이스라엘 대사관이 22일 애도의 뜻을 표하며 올린 희생자 야론 리친스키(오른쪽)와 사라 밀그림의 사진. 두 사람은 약혼 관계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주미 이스라엘 대사관

백악관·의회 의사당 등이 불과 2㎞ 떨어져 있는 수도 워싱턴 DC 한복판에서 총격 사건이 일어난 것도 충격적이지만, 미 정치권에서는 유대인을 상대로 한 표적 범죄였다는 점에서 분노가 커지고 있다. 사건 당시 박물관에서는 미국유대인위원회(AJC)가 유대인 전문가, 청년 외교관 등을 상대로 리셉션을 주최하고 있었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인도적 지원도 논의되고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AJC는 미국이스라엘공공문제위원회(AIPAC) 등과 더불어 미 정치권 막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대계 이익 단체다. 캐롤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은 이날 오후 브리핑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대사관 직원들이 살해된 것에 대해 슬퍼하고 분노했다”고 했다. 제닌 피로 워싱턴 DC 연방 검찰 검사장 대행은 기자회견에서 사형을 구형할 것이냐는 질문에 “아직 너무 이르다”면서도 “사형 선고를 할 수 있는 사건으로 보인다. 아주 끔찍한 범죄”라고 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트럼프가 반유대주의 타파 정책에 더 드라이브를 걸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지난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의 충돌 당시 미 대학가에서는 반전(反戰) 시위가 들끓었는데, 트럼프는 ‘시위대가 반유대주의를 조장하고 유대인 폭력을 선동했다’는 문제 의식이 상당하다. 재집권 이후 보조금을 삭감하는 등 전통적으로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대학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한편 이날 재외 공관이 밀집한 워싱턴 DC의 ‘엠버시 로우(Embassy Row)’ 지역에서는 이스라엘을 규탄하는 친팔레스타인 시위가 열렸다. 이날 시위대가 외친 구호 ‘팔레스타인에게 자유를(Free, Palestine)’은 지난해 대학가 반전 시위에 단골로 등장했고, 전날 로드리게스가 범행 직후 외친 것이기도 하다.

22일 재외 공관이 밀집한 워싱턴 DC의 '엠버시 로우' 지역에서 친팔레스타인 시위대가 행진을 하고 있다. /워싱턴=김은중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