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왼쪽)이 지난달 30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백악관 각료회의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1일 미군 작전 계획을 개인 메신저에 유출한 책임을 물어 마이크 왈츠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경질하고 마코 루비오(54) 국무장관이 겸직토록 했다. 미국 외교 사령탑이 백악관의 최고위 안보 참모를 동시에 맡게 되는 것은 외교의 전설 헨리 키신저(1923~2023) 이후 50여 년 만에 처음이라는 점에서 루비오의 위상이 주목받고 있다. 쿠바 이민자 흙수저 집에서 태어나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했던 루비오는 한때 미국 보수 정치권의 ‘젊은 피’로 대권을 넘보다 트럼프 2기의 실세로 변신을 거듭했다. 워싱턴 정가에서는 국제사회에서 미국이 적극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공화당 정통의 외교·안보 노선을 주창해온 루비오가 트럼프의 고립주의 외교 노선과 충돌하지 않고 순항하는 ‘처세술’에도 주목하고 있다.

루비오에게 주어진 직함은 이게 전부가 아니다. 미국의 대외 원조를 총괄하는 국제개발처(USAID) 처장 대행과 건국 후 지금까지 모든 자료를 관리하는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임시 청장까지 맡고 있다. 폴리티코는 5일 “거의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수준으로 트럼프 아래에서 큰일을 벌이고 있으며, 잦은 인사 교체가 특징인 트럼프 세계에서 생존을 모색하는 이들에게 교훈을 제공한다”고 했다. 루비오는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100일을 맞아 트럼프의 소셜미디어 ‘트루스 소셜’에 계정을 개설하고 올린 첫 글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지도력 하에서 미국 외교가 핵심 가치로 돌아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최신 뉴스들을 공유하겠다”고 말했다.

이처럼 트럼프에게 절대 충성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한때 트럼프와 껄끄러운 사이였다. 그는 플로리다주 연방 상원 의원이던 2016년 대선에서 공화당 경선 후보로 나서 트럼프와 경쟁했다. 당시 그는 아메리칸 드림을 몸소 실천한 마흔다섯 살의 젊은 정치인으로 일약 주목받고 있었다. 호텔 바텐더 아버지와 가사 도우미 어머니를 둔 가난한 쿠바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고교 미식축구 선수로 활약하며 법학대학원에 진학해 변호사가 된 ‘흙수저 엄친아’ 이력에 주목받았다.

플로리다주 하원 의원을 거쳐 2010년 상원으로 입성한 그는 북한과 중국 등 독재 정권에 대한 강력한 제재, 세계 주요 분쟁 지역에 대한 미국의 군사 개입과 대외 원조 확대 등을 주장한 매파로, 공화당 내 강경 보수 세력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동시에 중남미계 표를 대거 끌어모을 수 있는 중도 확장성도 높이 평가받았다. 하지만 부동산 재벌 출신으로 정치권의 이단아로 등장한 트럼프 돌풍을 넘지 못하고 중도 낙마했다. 경쟁자들에게 멸시적인 표현을 붙이길 즐겼던 트럼프는 루비오를 언급하며 수차례 ‘꼬맹이 마코(Little Marco)’라고 부르며 그에게 풋내기 이미지를 덧씌웠다.

이런 악연 때문에 트럼프가 지난해 대선에서 승리한 뒤 국무장관에 루비오를 낙점했을 때 뜻밖이라는 반응과 함께 “최약체 장관으로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트럼프 2기 100일이 지나면서 전망은 정반대로 엇나가고 있다.

실제로 루비오는 올해 1월 트럼프 내각 중 가장 먼저 상원 인준을 받아 장관에 취임한 뒤 자신의 외교관(觀)을 ‘트럼프 코드’에 맞췄다. 그는 원래 2022년 러시아의 침공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뒤 의회에서 줄곧 우크라이나에 대한 미국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국무장관으로 입각한 뒤 조기 종전을 주장하는 트럼프에게 맞춰 우크라이나에 대해 평화협정 체결을 압박했다. 또 국무부 조직을 대거 축소하는 방향으로 구조 조정을 단행하고, 대외 원조 프로그램을 대폭 삭감하고, 외국인 비자 발급 규정을 대폭 강화했다. 전임 조 바이든 대통령이 퇴임 직전 풀었던 쿠바 전면 제재도 신속하게 되돌렸다. 이렇게 루비오가 ‘트럼프 코드 맞추기’에 적극 나서는 모습을 보이자 트럼프는 “환상적으로 잘하고 있다” “그에게 전화하면 문제를 해결해준다”며 루비오를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칭찬했다.

미 정치권에서는 루비오가 국정 2인자인 J D 밴스 부통령과 함께 ‘매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뜻의 트럼프 구호) 왕국’의 후계자로 떠올랐다는 말까지 나왔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루비오가 굽히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트럼프가 주재하는 각료 회의에서 루비오는 국무부와 USAID에 대한 무자비한 예산 삭감을 추진한 일론 머스크 정부효율부 수장과 충돌했다. 국무부 구조 조정을 실세 머스크가 아닌 루비오가 주도하게 되면서 백악관 파워게임에서 루비오가 승리한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왔다.

일각에서는 루비오의 승승장구 배경으로 그의 정치적 기반이 플로리다라는 점을 꼽기도 한다. 폴리티코는 루비오가 같은 플로리다 출신인 수지 와일스 백악관 비서실장과 긴밀히 연락을 주고받으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전했다. 플로리다는 트럼프의 자택인 마러라고 리조트가 있는 곳으로, 트럼프 2기에선 플로리다를 기반으로 하는 정치인들이 대거 약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루비오가 필요할 경우 결단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도 주목받고 있다. USAID를 해체 수준으로 구조 조정하는 과정에서 친트럼프 진영에서 인기가 높은 피트 마로코 부처장이 무리한 업무 지시와 월권 논란으로 물의를 빚자 넉 달 만에 해고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국가안보보좌관. /조선일보DB

초보 장관인 루비오가 여러 임무를 부여받고 얼마나 잘 버틸 수 있을지도 관심거리다. 트럼프의 신임이 변함없다면 루비오가 최소 6개월 이상 국무장관·국가안보보좌관을 겸임할 가능성이 크다는 미 언론들의 전망도 잇따르고 있다. 그러나 냉전 시대 국제 질서를 설계하며 ‘외교의 황제’라 불린 키신저의 국무장관·안보보좌관 겸임에 대한 당시 시선이 곱지 않았다는 점이 변수가 될 수도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1969년 리처드 닉슨 행정부 대통령 취임 당시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발탁된 키신저는 1973년 국무장관까지 맡았다. 그러나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한 뒤 후임으로 취임한 제럴드 포드 대통령은 이 같은 겸직에 부정적이었고, 1975년 국가안보보좌관직을 브렌트 스코크로프트에게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