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전인 1974년 7월19일 이른 아침, 미국 워싱턴 DC 시내의 거대한 잔디 공원인 내셔널 몰(National Mall)의 리플렉팅 풀(Reflecting Pool) 앞에 12명의 남녀가 앉았다. 기다란 식탁에 앉은 모두 20대인 참석자 중 여성들은 발목까지 내려오는 드레스 가운을 입었다. 남성들은 정장이나 연미복을 입었고, 해군 정복을 입은 이도 있었다. 이들은 굴과 샴페인을 들면서, 길게 늘어진 링컨 기념관의 그림자 속에서 현악 4중주단의 연주에 맞춰 춤을 추기도 했다. 식사가 끝나자, 곧 모두들 부리나케 자리를 떴다.
워싱턴 DC의 대표적인 기념 명소에서 가진 이들의 아침 식사는 워싱턴포스트의 베테랑 사진기자 해리 날차얀(Naltchayan)의 카메라에 포착됐다. 다음날 이 신문의 스타일 섹션에 ‘몰에서: 12명의 새벽 브렉퍼스트’라는 제목으로 큼지막하게 실렸다. 물론 참석자들은 자신들이 사진에 찍힌 줄도 몰랐다.
이 사진은 이후 우주인의 달 착륙,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의 연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집무 사진 등과 더불어 이 신문사가 판매하는 미 현대사의 기념비적인 사진 중 하나가 됐다. 이 사진은 전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졌지만, 이른 새벽에 이곳에서 식사를 한 이들이 누군지, 왜 모였는지 아는 이는 이제 거의 없었다.
이 사진을 다시 되살린 것은 애초 이 사진을 찍은 워싱턴포스트 사진기자 날차얀의 딸 조이스 날차얀 보그호시안(Boghosianㆍ56)이었다.
그의 아빠는 35년 간 이 신문에서 일했다. 어린 시절 딸은 잉크 냄새가 진한 신문 뭉치를 들고 귀가하는 아빠에게서 그날 있었던 일들을 듣는 것이 늘 재미있었다. 아빠의 얘기는 매일 달랐고, 딸도 아빠의 이런 삶을 동경했다. 결국 딸 보그호시안은 아빠처럼 사진 기자가 돼, 종종 현장에서 아빠와 어깨를 나란히 하기도 했다.
딸 보그호시안은 1994년 숨진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이 사진을 접하게 됐다. 그는 아버지가 워싱턴포스트에서 찍은 수많은 미국 현대사 사진 중에서도, 이 사진이 가장 워싱턴 DC를 대표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후 사진 작가로 유명해진 딸은 강연을 할 때마다 이 아빠의 ‘내셔널 몰 아침 식사’ 사진을 전시했다.
작년 초 딸 보그호시안은 고령 인구를 위한 한 비영리단체의 초청으로 워싱턴 DC에서 강연을 하던 도중에 이메일을 받았다. 50년 전 아버지가 찍었던 그 아침 식탁에 앉아서 식사를 했던 사람이 청중 속에 있었다.
사실 이 워싱턴포스트의 사진은 그날 참석했던 이들의 거실과 다이닝 룸에 모두 걸려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도 이 사진에 대해 더는 얘기하지 않았다.
딸은 이후 그날의 참석자들을 수소문해서 만났다. ‘그날 아침’에 대해 궁금한 것이 정말 많았다. 당시 참석자들은 각자 찍은 기념 사진들과 메뉴, 식사 초대장, 수석 웨이터가 보낸 감사의 편지까지 보관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소상하게 밝혀진 그날의 사연은 이랬다.
참석한 20대 남녀는 대부분 연방 정부에서 일하고 있었다. 1960년대 미국 정부는 대대적으로 사람들을 뽑았다. 대학 친구와 이웃으로 만난 이들은 브리지 게임과 야외 활동을 함께 하며 가족처럼 친하게 지냈다. 생일이면 함께 보물찾기도 하고, 특별 이벤트를 열었다.
그런데 일행 중 재닛 할리가 27세가 됐을 때 유방암 말기 판정을 받자, 그룹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하이킹과 카누를 즐기던 이 젊은 여성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친구들은 할리의 28세 생일을 앞두고, 생각할 수 있는 최대의 깜짝 선물을 하기로 했다. 마침 일행 중 한 명이 몇 주 전에 리처드 닉슨 당시 대통령의 개인 비서였던 로즈 메리 우즈가 내셔널 몰에서 소풍을 즐기며 샴페인을 마시는 사진이 찍혔던 것을 생각했다.
이들은 ‘우즈가 마실 수 있다면, 왜 우리는 안 돼?’라고 생각했고, 몰을 관리하는 국립공원관리청을 찾아갔다. 그러나 내셔널 몰에서의 음주(飮酒)는 그때나 지금이나 당연히 금지 사항이었다. 할리와 함께 사는 친구 캐럴라인 버저는 우즈의 샴페인 사진을 언급하며 사정한 끝에 청장의 서명이 든 ‘식사 이벤트’ 허가증을 받아냈다.
친구들은 곧 현악 4중주단과 음식 주문, 그날 아침 자신들을 태울 리무진 2대를 준비했다. 물론 할리에겐 모든 것이 비밀이었다. 당일 오전 5시, 버저는 할리를 깨워 “이거 입으라”고 했다. 할리가 고교 졸업 축하 댄스 파티(prom)에서 입었던 옷이었다. 할리의 어머니에게 부탁해서, 미리 받아 놓은 것이었다.
할리는 영문을 몰랐지만, 무슨 일일까 기대하며 그 옷을 입었다. 밖에선 할리의 남자친구 웨슬리 윌리엄 콜린스가 마차를 타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이날 오전 7시, 12명의 친구들은 내셔널 몰의 리플렉팅 풀 앞에 차려진 식탁에 앉았다. 주인공 할리는 식탁 상석(上席)에 앉았다. 아침 안개 속에서 긴 촛대에 불이 붙여졌고, 2명의 웨이터가 분주하게 연어와 굴, 캐비아, 딸기, 데이니시 빵 등을 제공했다. 이른 아침 출근하던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서, 잠시 차를 멈추고 이들의 아침 식사를 구경하기도 했다.
50년이 지나, 기억은 조금씩 달라졌다. 당시 갹출한 비용은 총 2000달러가 넘었다고 한다. 워싱턴포스트는 지금 기준으로는 약 1만2700달러(약 1768만 원)라고 보도했다. 오전 9시 반 파티가 끝나고, 모두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출근하려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워싱턴포스트 사진기자의 딸 보그호시안을 만난 친구 도로시 웨일런(78)은 “사실 너무 감격이 벅차서, 거의 먹지도 못했다”며 “할리가 영원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날 모두 살아 있음을 함께 축하하는 우리만의 방식이었다”고 말했다.
보그호시안은 이후 이들의 인생 얘기를 듣고도 놀랐다고 한다. 참석자 중에서 킹 목사와 함께 앨라배마 주 흑인 인권행진을 했던 힐튼 포스터는 웨일런과 결혼했고, 미 증권거래위원회의 변호사가 됐다. 둘은 딸에게 재닛 할리의 이름을 붙여줬다. 할리의 룸메이트였던 버저는 교도소 수감자들을 위한 교육 개혁에 일생을 바쳤다. 또 한 사람은 시각장애인의 권익 신장을 위해 싸웠다.
보그호시안은 반(半)농담으로 50년 전 사진을 재연하자고 제안했다. 모두들 처음엔 거절했지만, 그동안 코로나 팬데믹으로 만나지도 못했는데 한번 모이자고 생각을 바꿨다.
이제 70,80대가 된 오리지널 멤버 12명 중 6명이 지난 7월 21일 내셔널 몰의 그 자리에 놓인 식탁에 앉았다. 50년 전의 자기 자리에 앉았다. 참석자 중 제인 나이버트는 50년 전에 입었던 옷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날 아침’ 수석 웨이터였던 팔머 맥 맥노튼은 50년 전 사진을 집 계단벽에 걸어 놓았다. 이날 식탁을 차리는 것은 맥노튼의 두 아들이 준비했다.
4명은 참석을 못했다. 주인공이었던 재닛 할리는 1982년 4월 사망했다. 35세였다. 그는 교육ㆍ보건부에서 여성에 대한 교육 차별을 막는 활동을 했다. 50년 전 그날 새벽 마차에서 할리를 기다렸던 남자친구 콜린스는 보건복지부 소속 법률가로 일하다가 2012년 사망했다. 또 다른 한 명은 시각장애인의 인권 변호사로 일했고, 2015년 숨졌다. 나머지 2명의 불참 사연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들의 자리는 모두 빈 의자로 남겼다.
‘재연 식사’엔 음악도, 춤도, 굴, 캐비아도 없었다. 식탁에는 제과점 빵 조각과 탄산수만 놓였다. 이번엔 50년 전 오리지널 사진을 찍었던 포스트 사진기자의 딸 보그호시안이 찍었다. 딸은 이날 행사 계획을 워싱턴포스트에 알렸고, 아빠와 일했던 편집자가 이번엔 딸을 고용했다. ‘원본 사진과 최대한 흡사한 구도로 찍으라’는 지시도 내렸다. 내셔널 몰에서의 이날 아침 식사 허가는 신문사가 받아냈다.
한 시간의 모임이 끝났을 때, 아무도 집에 돌아갈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 모두들 인근 음식점에 가서 식사하며 먼저 간 이들을 기리는 샴페인 건배를 했다. 그들 중에 새 멤버가 추가됐다. 오리지널 사진을 찍었던 포스트의 사진기자 해리 날차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