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들이 무조건 민주당만 찍는다는 건 옛말이에요.”

15일 오전 미 워싱턴DC의 전통 흑인대학(HBCU)인 하워드대 캠퍼스에서 만난 2학년 존 켄드릭씨는 “민주당만 지지해왔던 부모님을 보고 자랐던 ‘젊은 흑인’들의 민심이 빠르게 바뀌는 게 몸으로 느껴진다”고 했다. 오는 11월 미 대선을 앞두고 조 바이든 행정부가 ‘전통 지지층’인 흑인 그룹 지지율이 급속도로 떨어지면서 비상이 걸린 가운데, 미 국무부는 이날 일부 외신 기자들을 ‘흑인들의 하버드대(Black Harvard)’라고 불리는 하워드대에 초청해 간담회를 진행했다.

◇미 부통령 ‘모교’인데…학생들 상당 수 “바이든 실망”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작년 5월 13일 워싱턴DC의 하워드대 졸업식에 참석해 이 대학의 명예 박사학위를 받고 있는 모습. /로이터

하워드대는 미 수도 워싱턴DC의 유일한 HBCU이다. 남북전쟁으로 흑인들이 해방된 이후에도 대학 입학을 허용하지 않는 곳이 많았던만큼 흑인들의 교육을 위해 설립된 대학들을 뜻한다. HBCU는 흑인 고등 교육기관에 대한 연방정부기금의 지원을 법제화한 1965년 고등교육법을 통해 등장했다. 연방법으로 1964년 이전에 설립된 흑인 대학 101곳을 HBCU로 인증했다.

미국 최초의 흑인 연방 대법관 서굿 마셜과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여류 소설가 토니 모리슨 등 세계적 명사들이 졸업해 흑인 엘리트들이 선호하는 명문 사립대로 꼽힌다. 한 해 평균 등록금(학사)은 평균 5만5000불(약 7330만원)이다. 바이든 행정부의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이 대학 학부 출신이다. 2021년 12월 바이든 대통령 취임식 당시 바이든과 해리스가 백악관을 향해 행진할 때, 두 사람 모교인 델라웨어·하워드대 악대가 호위 행진을 펼쳤다. 하워드대 악대가 대통령 취임식을 누빈 건 처음이다. 바이든은 작년 5월 이 대학 졸업식에서 연설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지금까지 약 60억 달러(약 7조 9000억 원)를 HCBU에 지원했다”고 외쳤다.

그럼에도 이날 만난 학생들 상당 수는 “바이든에게 실망한 게 많다”고 했다.

15일 오전 미 워싱턴DC 흑인대학 하워드대 캠퍼스에서 2학년 학생 존 켄드릭씨가 외신 기자들을 안내하고 있다. /이민석 특파원

제이미 바(22)씨는 바이든 행정부 들어 미 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여성의 낙태할 권리를 연방 차원에서 인정한 1973년 1월 22일 대법원 판결)’를 뒤집은 데 대해서도 “바이든의 잘못이라고만 볼 수 없지만, 민주당 행정부가 들어서도 소수자들의 권리가 나아지고 있다는 걸 찾아보기 힘들다”고 했다. 바이든의 고령(82세)을 지적하는 의견도 있었다. 졸업반 나디아 웹씨는 “학생들 상당 수는 그가 백인인데다가 나이가 많아 마뜩 않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며 “이는 정말 큰 단절”이라고도 했다. 바이든이 과연 트럼프를 이길 수 있을 지에 대해 의구심을 표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신입생 데이비드씨는 “많은 친구들이 바이든이 민주당 주자로서 이길 수 있는 지에 대한 불안감(malaise)을 표하고 있다”고 했다.

이들은 바이든 행정부가 이스라엘과 이슬람 무장단체 하마스간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데 대해서도 불만을 보였다. 22세 여학생 러스씨는 “바이든 행정부가 말로는 ‘흑인’들을 위한다고 하면서 결정적일 때는 백인들의 이익에 맞게 결정하는 거 아니냐”고 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6일 백악관에서 열린 '흑인 역사의 달' 기념행사에서 흑인 가수 듀렐 밥스(일명 탱크)에게 친근감을 표시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1976년에 2월을 '흑인 역사의 달'로 정한 뒤 매년 이맘때 흑인 삶과 차별의 역사 등을 돌아보는 행사를 연다. /로이터 연합뉴스

3학년 무하마드씨는 이날 “나나 친구들 상당 수는 바이든 대통령이 노력한 건 맞지만 약속한 것에 비해 이룬게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경제가 나아졌다고 하지만 학생들은 고액의 등록금 대출을 언제 갚을 수 있을 지가 걱정”이라고 했다. 이날 만난 학생들이 말한 대표적인 사례가 학자금 대출 탕감 공약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대선 공약’으로 내걸어 임기 초부터 최우선 사안으로 추진해왔던 사안이지만, 그러나 연방대법원이 작년 6월 “행정부가 이런 막대한 자금(4300억달러·575조5500억원)에 대한 대출 탕감을 할 권한이 없다”며 제동을 걸었다. 이 학교 ‘교지’인 힐탑도 최근 이에 대해 “(학자금 공약 지연으로) 학생들의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는 기사를 보도했다.

흑인 그룹은 지난 2020년 당시 바이든이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통령을 700만표 차이로 꺾을 수 있게 한 핵심 유권자 층이었다. CNN에 따르면 당시 흑인층의 61%가 바이든을 지지했다. 그러나 바이든에 대한 흑인 유권자 지지율은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다. 지난 7일 갤럽이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바이든 임기 동안 흑인층에서 공화당에 대한 민주당의 우위는 약 20%포인트 감소했다. 바이든이 당선됐던 2020년은 66%였는데 작년 47%까지 떨어졌다. 이는 갤럽이 지난 1999년 관련 여론조사를 시작한 이래 가장 근소한 격차라고 밝혔다. 갤럽의 지난 12월 여론조사에 따르면 흑인 유권자 5명 중 1명은 트럼프나 바이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투표할 예정이라고 답했다.

◇흑인 지지율 노리는 트럼프, 경합주에서 결정적 역할 가능성

한편 트럼프는 바이든에 대한 흑인 유권자들의 지지율이 떨어진 상황을 파고들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작년 11월 뉴욕타임스 여론조사에 따르면 오는 11월 가장 경쟁이 치열한 6개 경합주에서 흑인 유권자의 22%가 트럼프를 지지하겠다고 답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2020년 흑인 유권자의 8%, 2016년에는 6%의 지지를 얻었었는데 지지율이 배 이상으로 증가한 데 대해 미 언론들은 “지난 반세기 동안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흑인 투표의 10 % 이상을 얻은 적이 거의 없다”며 “현대 정치에서 찾아보기 힘든 현상”이라고 했었다.

트럼프 캠프 내에선 기존 ‘콘크리트 지지층’인 백인들의 지지세를 흑인으로 확대하기 위해 부통령 후보를 흑인으로 골라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유일한 공화당 흑인 상원의원인 팀 스콧 의원(사우스캐롤라이나)은 최근 트럼프의 러닝메이트로 자주 거론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