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정보 당국들이 최근 전 세계에서 미 정보요원 및 외교관들을 위협하고 있는 이른바 ‘아바나(Havana) 증후군’이 적성 국가인 러시아 등의 공격과는 관련 없다는 잠정 결론을 내리고,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작성했다고 1일(현지 시각) 워싱턴포스트(WP)가 단독 보도했다. 아바나 증후군이란 원인 모를 두통, 구토, 어지러움, 균형감 상실 등을 나타내는 증세다. 그간 중앙정보국(CIA)나 연방수사국(FBI) 등의 정보·수사 기관들은 러시아 등 적성 국가가 ‘극초단파’를 이용해 미 관리들을 의도적으로 공격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합동 조사를 벌여왔지만, 이를 증명할 물증이나 공격 패턴이 수년간의 분석·조사에도 불구하고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바나 증후군은 2016년 쿠바 수도 아바나에 근무 중인 미국 외교관들에게서 처음 발견됐다. 갑자기 두통이 찾아오고, 어지러움과 메슥거림이 이어진다고 한다. 외상이 없는데도 고통이 계속되기 때문에 일을 하기 힘들고, 치료 방법도 마땅치 않았다. 영국 BBC는 “첫 (아바나 증후군) 사례는 철저히 비밀로 부쳐졌다. 그러나 결국 (대사관 등 내부에서) 말이 돌았고 불안감이 퍼졌다”고 했다. 2016년 이후로도 유사 증상이 중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 전 세계에서 근무 중인 미국 외교관 및 정보 당국자에게서 계속 나타났다. CNN방송은 “최근까지 피해자들은 월터 리드 군병원이나 국립보건원에서 치료를 거부당해 민간 병원을 전전하며 진단과 치료를 받아야 하는 형편이었다”고 했다.
전 세계에서 피해를 호소하는 이들이 200명이 넘자 조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2021년 10월 피해자들의 지원을 위한 법에 서명한 뒤 낸 성명에서 “이례적 건강상 사건을 겪고 있는 미 정부인사 지원에 최선을 다하도록 하는 아바나법에 서명해 기쁘다”며 “이 사건 대응은 행정부의 최우선순위 과제”라고 했었다.
그러나 WP는 이날 2명의 정보 당국 관계자를 인용해 “(아바나 증후군) 피해를 입은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은 러시아 등 적성 국가가 벌인 고의적인 공격의 희생자라고 말하고 있지만, (정보 당국의 보고서에 따르면) 거의 모든 면에서 모순되는 주장”이라며 “(해외에 있는) 미 대사관을 포함한 피해 사례들을 전수 조사한 결과 개별 (피해) 사례들을 서로 연결할 수 있는 패턴이나 공통된 조건들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들은 “법의학적 정보나 지리적 위치 정보 등을 포함해 누군가가 전파나 초음파와 같은 것을 사용했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며 “미 정보 기관이 (극초단파, 전파 공격 등) 외부의 악의적인 행동을 완벽하게 감시할 수 있는 곳에서도 이런 공격 패턴은 감지되지 않았다”고 했다. 다른 관계자는 “(광범위한 조사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없었다”고도 했다.
이는 미 국립 과학·기술·의약 아카데미가 19명의 전문가를 구성해 2020년 12월 내놓은 조사 보고서 결과와 배치되는 내용이다. 당시 보고서는 “극초단파(microwave)를 포함한 강하게 요동치는 무선 주파수 에너지가 아바나 증후군을 유발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휴대폰 등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전자파가 아니라 특정 세력이 악의적으로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었다.
러시아는 5~6년 전부터 극초단파로 사람의 뇌를 노린 무기를 개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극초단파의 주파수는 매우 촘촘해 철제와 콘크리트도 뚫을 수 있다. 또 극초단파는 사람의 귀를 거치지 않고 바로 측두엽에 전달돼 뇌 신경을 손상시킬 수 있다. 미 정보 당국은 러시아가 연관돼 있을 수 있다고 판단하고 조사를 진행해왔다. 윌리엄 번즈 CIA 국장이 러시아의 비밀정보기관이 아바나 증후군의 배후일 경우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러시아 측에 경고했다는 언론 보도도 나왔다.
그러나 WP에 따르면 특정 세력이 극초단파 등 외부 에너지를 사용했을 가능성에 대해 7개 정보 기관 중 5개 기관은 “매우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했고, 나머지 2개 기관은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CIA는 정부에 보고된 아바나 증후군 1000건의 원인을 조사한 뒤 대다수가 환경적인 요인이나 진단되지 않은 의학적인 조건, 스트레스 등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결국 아바나 증후군의 원인은 미궁에 빠졌다. 다만 WP는 “새로운 분석 기술이 나올 경우 정보 당국은 새로운 분석 및 조사를 진행할 것”이라고 했다. 미 국무부도 피해자들에 대한 치료 및 보상 등은 차질없이 진행하겠다는 입장이다. 익명의 소식통은 WP에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이런 정보 당국의 결론에도) 그들이 치료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입장”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