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시 브루클린의 한 가구·인테리어점. 매장을 둘러보는 기자에게 50대 사장은 “요즘 스물여덟에서 서른둘 정도 나이의 손님들이 엄청 늘었다”며 “뉴욕에 새로 이사왔다는데, 가격도 안 보고 마음에 드는 대로 다 사간다”고 했다. 27년 장사했는데 이런 건 처음 본다는 것이다.
“구매력을 갖춘 젊은 직장인들이 뉴욕에 몰린다”는 말은 맨해튼의 부동산 중개인 올리비아에게서도 들었다. 서부 캘리포니아에서 일하다 대륙을 가로질러 오거나, MIT·하버드 등 명문대 이공계 졸업생들이 예전처럼 실리콘밸리로 진출하는 대신 동부 대도시에서 커리어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의 배경엔 경제 중심지 뉴욕과 수도인 워싱턴 DC에서 크게 늘어난 고소득 IT(정보통신) 일자리가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날 일자리 데이터 분석 업체 버티스AI의 통계를 인용, 지난 연말 기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와 프로그래머 구인 건수가 워싱턴DC에서 3815건, 뉴욕 3325건으로 1·2위를 기록하며 ‘빅테크(대형 IT 기업) 성지’ 실리콘밸리가 있는 새너제이(2084건)와 샌프란시스코(2369건)를 처음으로 제쳤다고 보도했다. 실리콘밸리와 샌프란시스코의 엔지니어 수요는 지난해 상반기 정점을 찍고 급하강 중이다.
이는 지난해부터 침체 위기에 직면한 구글·메타 등 실리콘밸리 대기업들이 15만명 이상을 해고한 반면, 워싱턴DC와 뉴욕의 전통적 기업들이 새로 구직에 나선 고급 두뇌를 대거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워싱턴DC 일대엔 연방정부의 대규모 계약을 수주하는 IT 회사와 데이터센터가 집결해있는데, 인공지능(AI)과 반도체 등 첨단 기술을 산업·안보 측면에서 강화하는 정부 방침이 기업의 IT 인재 수요를 키우고 있다. 실제로 뉴욕 월가의 금융사와 통신·소매 분야에선 소프트웨어 개발부터 해킹 방어까지 기술 경영 중요성이 커지면서, IT 인력을 외주화하기보다 자체 인력으로 확보하려는 분위기가 강하다.
여기에 최근 캘리포니아에서 잦은 산불과 가뭄 등 이상 기후 현상이 빈발하고 주거비와 생활비가 미국 내 최고로 치솟아 노숙자가 급증하면서 사람들이 동부 대도시의 환경을 좀 더 안정적이라고 여기는 분위기도 한몫했다는 분석이다. “실리콘밸리에서 연봉 20만~30만달러(2억5000만~3억8000만원)를 받아도 삶의 질이 너무 떨어진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텍사스에 본사를 둔 소프트웨어 기업 카이젠테크놀로지는 “직원들 요청으로 샌프란시스코 사무실을 닫고 뉴욕에 사무실을 열기로 했다”며 “젊은 직원들은 뉴욕이 더 재미있는 곳이라 생각한다”고 WSJ에 말했다. 억만장자 피터 틸이 창업한 소프트웨어 회사 팔란티어는 현재 뉴욕과 워싱턴DC에 각각 750명, 400명의 엔지니어를 고용하고 있지만, 샌프란시스코 팰로앨토에는 200명이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