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년간 연방 하원에서 민주당을 이끈 낸시 펠로시(82) 하원의장이 “다음 회기 때는 민주당 지도부 선출에 재도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17일(현지 시각) 발표했다. 지난 8일 치른 미국 중간선거 개표 결과, 공화당이 하원 의석 총 435석 중 과반인 218석을 차지해 민주당이 다수당 지위를 뺏기게 되자 내년 1월 시작하는 다음 회기 민주당 지도부 선거에 나가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이날 하원 본회의장에서 민주당 의원들 앞에 선 펠로시 의장은 “내가 깊이 존경하는 민주당 의원들을 새로운 세대가 이끌 때가 왔다”며 차세대에 길을 열어주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민주당 하원 서열 2, 3위인 스테니 호이어(83) 민주당 원내대표, 짐 클라이번(82) 원내총무도 지도부 사퇴 의사를 밝혀 민주당 하원 지도부가 완전히 바뀌게 됐다.
펠로시 의장은 2003년 1월 당시 하원 소수당이었던 민주당의 원내대표가 된 이래 20년간 민주당 하원 의원들을 이끌었다. 2007년 민주당이 다수당이 되면서 미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하원의장에 선출돼 2007~2011년과 2019년부터 현재까지 8년에 걸쳐 미국 의전 서열 3위의 하원의장직을 수행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시절에는 오바마 행정부의 의정 파트너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시절에는 트럼프 대통령의 ‘아치 에너미(arch enemy·커다란 적)’로 늘 미국 정계의 핵심에 있었다.
이날 미 의회 전문 매체 ‘더힐’은 펠로시 의장의 퇴진 소식을 전하는 기사에 ‘한 시대의 끝(End of an era)’이란 제목을 붙였다. 이날 펠로시 의장의 용퇴 의사를 밝힌 본회의장에는 민주당 의원들뿐만 아니라 스티브 스컬리스 공화당 하원 원내총무를 포함한 소수의 공화당 의원도 있었다고 CNN은 전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역사는 그(펠로시)를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했던 하원의장으로 기억할 것”이란 성명을 발표했다.
펠로시 의장은 다섯 아이를 기르는 전업주부로 살다가, 막내가 고교생이던 47세에 처음 연방 하원 의원에 출마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1940년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6남1녀 중 막내이자 고명딸로 태어날 때부터 정치는 그의 운명이었다. 부친 토머스 달레산드로 주니어는 펠로시가 태어날 당시 연방 하원의 초선 의원이었고, 1947년부터 1959년까지 12년간 볼티모어 시장을 지냈다. 오빠 토머스 달레산드로 3세도 1967년부터 1971년까지 볼티모어 시장을 지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펠로시 의장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선거운동을 도우며 자랐다고 한다. 1963년 결혼한 남편 폴 펠로시는 벤처 캐피털 회사 창립자로, 남편의 재력과 인맥도 정치에 도움이 됐다. 펠로시 의장의 퇴진 결정에는 지난달 28일 샌프란시스코 자택에 자신을 노리고 침입한 남성의 공격을 받아 남편이 크게 다친 것도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7년 처음 연방 하원이 된 펠로시 의장은 정치 커리어 초반부터 인권 문제에 목소리를 높였다. 1989년 6월 4일 중국에서 천안문 사태가 발생한 직후 그는 “중국인들의 인권은 내정 문제가 아니다. 전 세계인이 우려하는 문제”라고 선언했다. 1991년 베이징을 방문한 펠로시는 자신을 초청한 중국 정부의 입장을 아랑곳하지 않고 천안문 광장에 찾아가서 ‘중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숨진 이들에게’라고 적힌 꽃다발을 바쳤다. 잠시 중국 공안에 구금된 뒤 풀려난 그는 기자들에게 “지난 이틀간 우리는 (중국 정부에서) 이제 중국에도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들었다. 이것은 우리가 들은 얘기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후로도 매년 천안문 사태 기념일에는 관련 성명을 발표했다.
하원의장이 된 다음 해인 2008년 3월에는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는 인도 다람살라에 의회 대표단을 이끌고 찾아가서 달라이 라마를 만났다. 당시 펠로시 의장은 “중국과 티베트에서 일어나는 중국의 억압에 대해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계 어디에서든 인권을 위해 말할 도덕적 권위를 모두 상실할 것”이라고 했다. 펠로시 의장이 바이든 행정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지난 8월 대만을 방문한 것도 ‘인권을 위한 정치인’이란 레거시를 확고히 하기 위한 것이란 분석이 많다. 이번 중간선거에서 19선에 성공한 그는 샌프란시스코에 지역구를 둔 하원 의원으로서의 활동은 계속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