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메릴랜드주(州)에 사는 에블린 래 드로이터 에카드(93)씨는 그의 남동생 로이 찰스 드로이터를 두고 “장난꾸러기 청년이었다”고 말했다. 1948년 미 육군에 입대한 드로이터는 1950년 6월 25일 북한 인민군이 남침(南侵)한 뒤 곧장 전장에 투입됐다. 6개월 지난 1950년 11월 27일, 그가 속한 미 제7보병사단 제32보병연대 기지가 중공군에 의해 습격당했다. 고국에 가족들을 남겨두고 전장에 나선 그는 한반도 땅에서 끝내 전사(戰死)했다. 그의 나이 21세였다.
지난 19일(현지 시각) 미국 프레드릭 뉴스포스트에 따르면, 드로이터 가족은 그가 생존해 집에 돌아올 수 없을 것임을 미리 눈치 챘다고 한다. 6·25 전쟁이 휴전에 돌입하고, 미군 포로들이 풀려나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의 여동생 글래디스 제인 드로이터 클라인(91)은 “포로들이 풀려나면서, 우리 가족은 하염없이 거실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의 어머니는 “저들 중 아들이 있을 수 있다”고 되뇌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오빠가 집에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하지만 그의 유해마저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수많은 미군 유해 중, 드로이터의 신원이 70여년째 확인되지 않은 것이다. ‘실종 상태’라는 꼬리표는 그의 가족들을 계속해서 괴롭혔다. 집 부엌 한쪽 편엔 그가 여동생에게 선물했던 나무 조각 하나만 있을 뿐이었다. 그 사이 드로이터의 부모, 아내, 몇몇 형제는 세상을 떠났다.
전장에 나서기 전 아내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가졌던 드로이터. 세 살의 나이에 아버지와 작별했다는 그의 딸 샤를린 드로이터(74)는 “항상 아빠가 어디 계실지 궁금했다”고 말했다. 어릴 적 딸의 취미는 ‘전쟁 다큐멘터리 보기’. 한국전쟁의 참상이 담긴 수많은 영상을 보면서, ‘혹시라도 나타날지 모르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늘 마음 졸였다고 한다.
지난 19일, 드로이터의 유해가 성조기 덮인 관 속에 담긴 채 집으로 돌아왔다. 지난 1월 “동생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그의 가족들은 쓰러져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유해로 돌아온 드로이터를 70여년 만에 끌어안았다. “우리가 죽기 전에 남동생의 시신이 발견돼 집에 돌아오길 평생을 기도했어요. 그가 정말 이렇게 돌아오는 것을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드로이터의 장례는 22일 헤이거스타운 ‘레스트 헤이번(Rest Haven) 장례식장’에서 열린다. 그의 부고 (訃告)는 다음과 같이 적혔다. “음악을 사랑하고, 노래 솜씨가 좋았으며, 10살 때 하모니카 연주를 배웠던 청년. 네 잎 클로버를 잘 찾아내곤 했습니다.”
앞서 북한은 2018년 6·25전쟁에서 전사한 미군 병사들의 유해가 담긴 상자 55개를 미국으로 인도했다. 미 국방부 산하 전쟁포로실종자확인국(DPAA)은 이들 상자에서 유해 총 81구의 신원을 확인했다. 이 중 한 명이 드로이터였다. DPAA는 지난 2월까지 총 608구의 한국전쟁 참전 미군 유해 신원을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직 7547명의 미군이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채, 가족들 품에 안기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