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주둔 미군의 생화학물질특수부대(CBIRF) 요원들이 2020년 수니파 거점도시인 팔루자에서 미 해병대 1사단 병사들에 의해 발견된 성분 불명의 화학액체를 특수용기에 담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가 생·화학무기를 사용할 가능성이 대두, 국제사회를 더욱 긴장시키고 있다. 미 백악관은 16일(현지 시각) 제이크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이 니콜라이 파트루셰프 러시아 국가안보서기와의 통화에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화학·생물무기를 사용하는 어떤 결정을 내린다면 후과와 영향이 뒤따를 것”이라고 경고했다고 밝혔다. 지난 11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미국이 갖고 있는) 정보에 대해 말하지는 않겠지만 러시아가 화학무기를 사용한다면 심각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언론에 말한 데 이어 러시아에 직접 경고를 보낸 것이다.

유럽 국가들도 미국의 우려를 공유하고 있다. 장이브 르 드리앙 프랑스 외교부 장관은 16일 파리지앵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에서 화학 또는 세균을 이용한 공격이 일어난다면 순전히 누구 책임인지 우리는 안다. 러시아일 것”이라고 말했다. 전날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은 기자회견에서 “(러시아가) 화학무기를 포함한 가짜 깃발 작전(자작극)을 벌일 수 있다고 우려한다”고 말했다.

서방 국가들이 이처럼 러시아의 생·화학무기 사용을 우려하고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러시아가 이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러시아 외교부의 마리아 자카로바 대변인은 지난 8일 “우크라이나 정권이 미 국방부 자금을 받아 (중략) 러시아 국경에 근접한 연구소에서 생물무기의 부품을 개발하고 있었다”고 발표했다. 우크라이나가 미국의 지원을 받아 페스트, 탄저병, 야토병, 콜레라 등의 치명적 세균을 이용한 무기를 개발하고 있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이 우크라이나 침공을 준비하던 지난해 12월 “(우크라이나가) 도발을 자행하기 위해 비축돼 있던 정체불명의 화학물질을 옮겼다”고 말한 사실도 뒤늦게 주목받고 있다.

러시아의 주장은 아무런 근거 없는 것이지만, 중국 외교부는 트위터에 “미국은 30국의 336개 연구소를 통제하고 있고 우크라이나에만 26곳이 있다. 미국은 국내외의 생물학적 군사 활동을 모두 밝히고 다자적 검증을 받아야 한다”는 글을 올리며 지원 사격에 나섰다. 중국의 도움에 힘입은 러시아의 바실라 네벤자 주유엔 대사는 11일 유엔 안보리 회의에서도 우크라이나가 생물전을 준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 전부터 생·화학무기의 사용을 검토해 왔으며 그 책임을 우크라이나에 떠넘기기 위해 ‘사전 선전전’에 돌입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린다 토머스그린필드 주유엔 미국 대사는 11일 “미국이 지원하는 우크라이나의 생물 무기 연구소는 러시아 국경 근처든 어디에든 존재하지 않는다”며 “러시아가 ‘가짜 깃발’(자작극)을 꾸며내려고 이런 주장을 할 가능성을 깊이 우려한다”고 했다. 미국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이 실패로 끝날 것을 우려해 어떤 형태로든 생·화학무기를 쓸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생·화학무기는 국제법으로 금지돼 있다. 보리스 옐친 대통령 시절 생물무기 금지협약(BWC), 화학무기 금지협약(CWC)에 가입한 러시아도 공식적으로는 소련 시절 보유했던 이런 무기들을 폐기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집권 후에도 화학무기를 여러 차례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러시아 정찰총국(GRU)은 2018년 3월 영국에 머물고 있던 러시아 출신의 이중 스파이 세르게이 스크리팔을 소련 시절 개발한 신경작용제 ‘노비촉’으로 암살했다. 2020년 8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정적(政敵)인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가 비행기 안에서 갑자기 중독 증상을 보이며 쓰러졌는데, 그의 몸에서도 노비촉이 검출됐다. 시리아 내전에서 러시아의 후원을 받고 있는 아사드 정권 측도 여러 차례 화학무기를 사용해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고 있다.

미 온라인 매체 ‘액시오스’는 17일 “화학무기나 생물무기가 사용됐다는 주장은 조사하기 어렵기 때문에 다른 나라를 공격하는 빌미를 만들어 내는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보도했다. 공기 중에 살포된 화학물질이나 병원체를 수집해서 분석하는 과정이 어렵고 시간이 오래 걸릴뿐더러, 누가 제조해서 살포했는지 분명한 증거를 찾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