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유력 일간 뉴욕타임스의 뉴욕 맨해튼 본사 전경. 뉴욕타임스는 지난 5년간 세러 페일린 전 공화당 부통령 후보가 제기한 명예훼손 소송 1심에서 승소했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50년간 각종 명예훼손 소송에서 패소한 적이 없다. /AFP 연합뉴스

유력 정치인 등 공인(公人)에 대한 언론 보도에서 사실 관계가 일부 틀렸더라도 이를 ‘악의(惡意)’로 확대 해석해 명예훼손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판결이 미국에서 나왔다. 보도에 대한 악의의 입증 책임은 원고(原告)에게 있다고도 했다. 권력의 겁박이나 재정적 파탄을 걱정하지 않고 기자들이 취재·보도할 수 있는 언론 자유를 최우선 가치로 삼아야 한다는 미 헌법 정신과 관련 대법원 판례를 따른 것이다.

뉴욕 맨해튼 남부지방법원은 15일(현지 시각) 2008년 공화당 부통령 후보였던 세라 페일린 전 알래스카 주지사가 뉴욕타임스(NYT)를 상대로 낸 명예훼손 소송 1심에서 배심원단 만장일치로 원고 패소 결정을 내렸다. 페일린 전 주지사는 한화 수백억원 규모로 추정되는 이번 소송에서 NYT가 ‘실질적 악의(actual malice)’를 가졌다는 점을 입증하지 못했다는 게 재판부의 설명이다. 주심 제드 래코프 판사는 이날 “악의를 품었는지를 판단하는 법의 기준은 매우 높다”고 말했다. 페일린은 즉각 항소할 뜻을 밝혔다.

2008년 미 대선에서 공화당의 부통령 후보로 나섰던 새러 페일린 전 알래스카 주지사가 15일(현지시각) 뉴욕 맨해튼 지방법원에서 뉴욕타임스를 상대로 한 명예훼손 소송 1심 패소 판결을 받고 나와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이 소송은 2017년 ‘미국의 치명적 정치’란 제목의 NYT 사설에서 시작됐다. 공화당 스티브 스컬리스 원내총무가 야구 연습 중 괴한의 총격을 받은 사건을 놓고 NYT는 “이번 일은 미 정치가 얼마나 살벌해졌는지 보여준다”며 2011년 애리조나주 투산의 총격 사건을 언급했다. 당시 22세 대학생이 민주당 개브리엘 기퍼즈 하원의원 일행에 총기를 난사해 6명이 숨졌다. 기퍼즈는 머리에 총을 맞았다. NYT는 “페일린 전 주지사 지지 단체 ‘페일린 PAC(정치행동위원회)’가 낙선 운동을 벌이던 민주당 의원 20명의 지역구를 지도에 표기해 공개했는데 여기에 기퍼즈가 포함돼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페일린 전 지사와 기퍼즈 의원 총격이 직접 연관됐다는 듯한 이 문장은 팩트가 아니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그러자 NYT는 다음날 “두 사안의 연관성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정정 보도를 냈다. 사설을 쓴 제임스 베넷 논설위원도 “편집 과정에서 과도한 해석이 들어갔다”며 사과했다. 그러나 페일린은 “베넷은 실수가 아니라 나에 대한 적대감(animus)으로 사설을 썼다”고 주장하며 소송전에 돌입했다. 다른 유명인 명예 훼손 사건으로 수천만 달러 규모의 배상금을 받아낸 호화 변호인단을 선임했다.

이 사건은 지난 5년간 미 언론계와 학계에서 초미의 관심사였다. 정치인들이 비판 언론에 대해 ‘가짜 뉴스’ 라고 공격하는 것이 일상화하면서 법정 소송이 증가, 기자들이 위축되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을 때 소송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지난 15일 미 언론계와 학계, 정계의 이목이 쏠린 가운데 뉴욕 맨해튼 지법에서 열린 '뉴욕타임스 대 페일린' 사건 1심 재판을 그린 법정 스케치. /로이터 연합뉴스

뉴욕 법원은 페일린 전 주지사가 NYT가 그에게 ‘실질적 악의’를 갖고 사설을 썼다는 점을 입증하지 못했다고 못 박았다. ‘실질적 악의’는 1964년 미 연방대법원의 ‘뉴욕타임스 대 설리번’ 판결문에 등장한 표현이다. 당시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시 경찰서장 L.B. 설리번이 NYT에 실린 흑인 인권단체의 정치 광고에 대해 “내가 하지 않은 일로 명예훼손을 당했다”며 3억 달러대 소송을 냈다. 하지만 대법원은 “공인은 공적 업무에 대한 비판에 ‘실질적 악의’가 있다는 점을 입증해야 한다”며 NYT의 손을 들어줬다.

이 판례는 지난 60여 년간 미 수정헌법 1조 ‘표현의 자유’ 조항과 함께 미 언론 관련 소송의 중요한 근거가 됐다. 미국에선 유력 인사가 언론사를 명예훼손이나 악의적 보도를 이유로 제소하거나 승소하는 경우가 극히 드문 이유다. NYT의 경우 50여 년간 각종 명예훼손 소송에서 패소한 적이 없다.

지난해 9월 더불어민주당 소속 의원들이 국회의원들이 언론의 허위보도에 최대 5배의 징벌적 손해배상을 할 수 있게 하는 언론중재법 개정안 처리를 촉구하는 회견을 열고 있다. 언론중재법은 국내 언론단체는 물론 유엔과 휴먼라이츠워치 등 인권단체와 국제 언론단체로부터 '언론 재갈법'이란 비판 속에 일단 철회됐다. /뉴시스

‘NYT 대 페일린’ 사건은 더불어민주당이 추진했다가 국제사회의 비난 속에 잠정중단한 언론중재법 개정안 시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여당은 언론의 고의 혹은 중대 과실로 허위·조작 보도를 한 경우 손해액의 최대 5배에 달하는 징벌적 손해배상을 도입하려 했다. 특히 원고가 제기한 ‘고의·중과실’이 없다는 점을 거꾸로 피고인 언론사가 입증하도록 해 형법 원칙을 훼손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여당은 ‘가짜뉴스 피해구제법’이라고 주장했지만, 국제 언론·인권 단체와 유엔(UN) 등은 정치 권력이 언론을 겁박하는 ‘언론재갈법’이라고 규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