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민주당)이 국회의원들의 주식 투자를 금지하는 법안 마련을 추진하라고 하원 운영위원회에 지시했다고 AP통신 등이 9일(현지 시각) 보도했다. 펠로시 의장은 그간 주식 투자 규제에 반대 입장이었으나, 관련 규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거세지자 입장을 180도 바꾼 것이다.
펠로시 의장은 이날 기자들과 만나 “의원들의 주식 거래를 금지하는 법안을 마련하고 있다”고 밝혔다. 펠로시 의장은 작년 12월에만 해도 “우리(미국)는 자유 시장 경제 체제다. 그들(의원들)도 자유시장 경제에 참가할 수 있어야 한다”라며 반대 입장이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재산이 1억달러(1200억원)가 넘는 펠로시 의장이 입장을 유턴한 것”이라며 “(입장 변경은) 민주당 의원들의 의견을 반영한 것”이라고 했다.
미 국회의원들의 주식 거래 금지 여부는 최근 몇 년간 지속적으로 찬반이 갈려온 주제다. 미국에서 의원들은 본인뿐 아니라 배우자, 그리고 부양자녀의 투자 내역을 모두 공개해야 한다. 다만 주식 거래 자체는 어떠한 제한도 받고 있지 않다. 한국의 경우 공직자윤리법에 따라 재산 공개 대상인 고위공직자나 국회의원은 본인 및 그 이해관계자(배우자 및 직계 가족)의 보유 주식이 총 5000만 원을 초과하는 경우 2개월 이내에 주식을 매각하거나 백지신탁 계약을 체결해 60일 이내에 처분하도록 하고 있다.
미국에도 의회 활동 중 얻은 정보를 통해 주식 거래를 금지하겠다는 취지의 주식거래금지법(Stock Act)이 있긴 있다. 이에 따르면 의원들은 주식 거래 내역을 거래일로부터 45일 이내에 의회사무처에 보고해야 한다. 의회 사무처는 거래 내역을 의회 웹사이트에 공개한다. 다만 보고를 하지 않거나 시일을 넘기는 등 법을 어길 경우 벌금이 200달러에 불과하다. 상임위 업무에 속하는 기업의 주식 매매를 금지하거나 하는 조항도 따로 없다. 이 때문에 의원들의 이해 충돌을 막는 효과가 거의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미 언론 등에선 그간 ‘의원들이 직무상 취득한 내부 정보를 이용해 주식 투자를 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막아야 한다’며 주식 거래 금지 필요성을 주장해왔다. 그러나 의원들 상당수가 반대 의견을 내세워 의회에서 추가 입법이 이뤄지지 않았다. 반대 입장을 보여온 의원들은 “의원 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 주식 투자를 금지할 경우 정치인을 외부에서 기용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논리도 내세웠다.
미 의회에서 대표적인 ‘갑부’로 꼽히는 펠로시 하원의장도 이런 입장이었다. 미 정치자금 추적 단체 오픈시크릿츠(OpenSecrets)에 따르면 가장 최근 자료인 2018년 신고 자료를 바탕으로 추산한 펠로시 의장 자산은 1억1470만 달러에 달한다. 그러나 당내 강경파들의 강력한 요구로 입장을 바꾼 것이다.
존 오소프, 마크 켈리 민주당 상원의원 2명은 의원들과 배우자, 부양 자녀들이 주식을 백지신탁을 하도록 강제하는 법안을 발의한 상황이다. 또 엘리자베스 워런 민주당 상원의원과 스티브 데인스 공화당 상원의원은 더 강력한 법안을 추진 중이다. 상원·하원 의원들은 모두 현대 가지고 있는 주식을 팔아야 할 뿐만 아니라, 임기 중에 주식 거래를 원천적으로 금지하는 내용이다. FT는 “이미 발의된 법안이 많은데 펠로시 의장이 별도로 법안 마련을 지시한 것을 두고 ‘실제 추진 의사가 있느냐’며 의구심을 표하는 의원들도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