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진보 성향 최대 케이블 뉴스채널인 CNN의 제프 저커(56) 전 사장의 사임은 그가 아꼈던 CNN 스타 앵커였던 크리스 쿠오모(51)의 사생활 폭로에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크리스 쿠오모는 지난해 여직원 성추행으로 사임한 앤드루 쿠오모 전 뉴욕주지사의 동생으로, 형의 성추문을 은폐하는 데 행동대장처럼 나섰다는 논란으로 CNN에서 해고된 인물이다. 뉴욕타임스(NYT)와 폭스뉴스, 월스트리트저널 등은 “크리스가 자신을 해임한 저커에게 복수하려 저커의 부적절한 사내 연애를 폭로하는 ‘물귀신 작전’을 썼다”고 4일 보도했다.
앞서 지난 2일 저커 전 사장은 동료인 앨리슨 골러스트(49) CNN 수석 부사장과 연인 관계임을 미리 밝히지 못한 책임을 지겠다며 사임했다. 당시 두 사람의 관계가 드러난 경위를 놓고 ‘CNN 내부의 크리스 쿠오모 언론 윤리 위반 사건 조사 중 밝혀졌다’고만 알려졌었다.
NYT 등이 CNN 관계자들과 크리스의 변호인 등을 인용해 전한 전말은 이렇다. 크리스는 CNN의 모회사 워너 미디어가 지난해 12월 자신을 불명예 해임하며 남은 계약 기간의 연봉은 물론 거액의 퇴직금도 지급하지 않기로 하자 약 2000만달러(240억원) 규모의 반환 소송을 냈다. 그는 소송 전 중재 협상이 잘 풀리지 않자 최근 변호인단을 통해 사측에 “저커 사장과 골러스트 부사장이 몰래 관계를 맺어왔다는 사실을 폭로하겠다” “형의 성추문 은폐 시도에 저커도 연루돼있다”고 반격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들은 저커 전 사장은 ‘비밀 연애’만 인정하고 즉각 사임을 발표했다. 워너미디어와 CNN 내규엔 임직원들끼리 사적 관계를 맺은 사실을 공개하게 돼있으며, 특히 어느 한쪽이 요직에 있는 경우 이런 의무를 더 강하게 부과한다고 한다. 사적 감정이 인사와 경영에 영향을 미쳐 이해 충돌을 일으킬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저커와 골러스트는 각각 이혼했지만 그 전부터 내연 관계였다는 소문이 파다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저커와 골러스트 커플은 쿠오모 형제와 막역한 사이였다. 골러스트 부사장은 2011년 쿠오모 전 주지사 당선 후 공보 책임자를 지냈었다. CNN 최장기 사장을 지낸 저커는 앵커를 중심으로 한 스토리텔링식 보도 방식을 도입하고 전면에 크리스 쿠오모 앵커를 내세워 흥행에 성공했다. 저커는 2020년 코로나 팬데믹 초기 당시 앤드루 지사의 방역 리더십을 칭찬하면서, 사내 반대에도 불구하고 크리스 앵커가 직접 형을 인터뷰하는 초유의 ‘형제 방송’을 내보내 히트시키기도 했다. 이 때 인기 덕에 앤드루 쿠오모는 차기 민주당 대선후보로 거론됐다.
지난해 8월 앤드루 전 지사가 검찰의 성추행 조사 결과로 사임한 뒤 크리스가 형의 측근들과 함께 피해자 압박과 언론 대응 등을 논의했다는 논란이 터진 뒤에도 크리스를 감싼 것이 저커 전 사장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크리스 쿠오모마저 다른 여성 앵커를 성추행했다는 폭로가 나오자 직접 칼을 뺐다. 마지막 순간에 돌아선 저커 전 사장에게 쿠오모가 앙심을 품었다는 것이다.
이번 CNN 사장의 사임은 민주당 거물이었던 고 마리오 쿠오모 전 뉴욕주지사의 아들들로, ‘뉴욕의 왕조’로까지 불렸던 쿠오모가 형제들이 성추문으로 정계와 방송계의 정점에서 퇴출 당하면서 벌이기 시작한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의 낙진(fallout) 중 하나일 뿐이라고 NYT는 전했다. 앤드루 쿠오모는 자신을 고발한 전 직원 등 성추행 피해자들은 물론, 성추행 조사를 이끈 민주당 소속의 레티샤 제임스 뉴욕주 검찰총장 등을 향한 복수에 돌입했다. 쿠오모 전 지사는 지지자들의 후원으로 1600만달러 규모의 정치자금을 확보, 다시 공직 진출을 위해 명예 회복에 나선 것으로 전해졌다.
NYT는 “‘내가 무너지면, 너도 무사하지 못하다’는 게 지금 쿠오모 형제들의 분위기”(쿠오모 성추행 피해자) “자신들을 보호해주지 않은 진보 진영 내부에 대한 복수 도미노가 어디까지 갈 지 모른다”(CNN 기자)는 말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