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기다려 본 선거도 없는 것 같아요.”

2일(현지 시각) 오후 12시쯤 미 버지니아주(州) 주지사 선거 당일 알링턴 카운티의 워싱턴 리버티 고등학교 앞에서 만난 46살 타일러씨는 이렇게 말했다. “현 정부의 좌파(leftist) 교육에 진절머리 났다”며 “우리 아이들이 배우는 것을 부모들이 아무런 관여도 하지 못하고 권한 없이 가만히 있을 순 없다”고 했다. 그는 ‘나는 투표했다’(I voted)라고 적힌 스티커를 외투 위에 붙이면서 “대선은 몰라도 이번 주지사 선거는 공화당이 승리할 것”이라고 했다.

30여분 뒤 인근 커뮤니티 센터에서 만난 33살 미셸씨는 투표장에 들어서기 전 “트럼프 때의 시기(era)가 지나간 지 얼마나 됐다고 트럼프의 측근을 다시 뽑을 수 있느냐”고 했다. 이어 “비가 이렇게 쏟아져도 투표는 한다”며 “트럼프 망령은 다시 안된다”고 했다.

버지니아 주지사 선거 당일인 11월 2일(현지 시각) 오후 알링턴 카운티의 워싱턴 리버티 고등학교 앞에 차려진 투표소 앞에 민주당 및 공화당 후보들의 이름이 적힌 팻말이 줄지어 있는 모습. /이민석 특파원

이번 선거는 민주당 소속 테리 매컬리프 전 주지사와 공화당 소속 글렌 영킨 후보가 맞붙는 양자 구도다. 현지 언론 매체들은 이번 버지니아 주지사 선거는 내년 중간 선거 결과를 가늠할 수 있는 바이든 행정부의 ‘중간 평가’가 될 것이라고 본다.

바이든 대통령과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리전’ 성격도 있다. 바이든 행정부로서는 이번 선거 결과가 국정 운영에 적잖은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의회 전문 매체 더힐은 “버지니아 주지사 선거는 바이든 대통령 당선 이후 약 1년 만에 치러지는 만큼 (대통령직에 대한) 중간 평가인 동시에, 내년 중간 선거를 앞둔 전조”라고 했다.

그간 매컬리프 후보가 영킨 후보를 오차 범위 밖에서 앞서왔다. 시간이 갈 수록 영킨 후보가 차이를 좁혀왔고, 최근 들어선 매컬리프 후보를 앞선다는 조사 결과가 잇따라 나오고 있다.


◇”교육 이대로는 안된다” 이번 선거 뇌관

이날 부인과 함께 투표를 하러 온 59세 맨들씨는 “학교 교육이 이대로 가면 안 된다. 학교가 이상한 것들을 가르치는 데 학부모들이 관여를 못하게 하는 것은 다른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고 했다. 그는 “특히 CRT(비판적 인종 이론)와 같은 말도 안되는 것들을 왜 학교에서 억지로 가르치는 지 이해가 안간다”고 했다. 이전 주지사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를 투표한 적이 있다는 그는 “이번에는 공화당을 찍을 것”이라고 했다.


미국 버지니아 주지사 선거 바로 전날인 1일(현지 시각) 공화당 소속 글렌 영킨 후보가 체스터필드에서 열린 유세에서 지지자들에게 연설을 하고 있는 모습. /AP 연합뉴스

민주당 지지층에서 확산하는 CRT는 인종차별은 개인의 편견 때문이 아니라 백인 우월주의에 뿌리를 둔 각종 법과 제도, 기관 등 구조적 문제 때문에 발생한다는 주장이다. 공화당은 “반(反)백인 정서, 증오심을 부추기는 왜곡된 이론”이라며 반박하고 있다. 이들은 CRT 이론이 미국 역사를 ‘백인 우월주의’로만 묘사해 부인하려는 극단적 역사관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고소득 지역인 북버지니아 지역을 중심으로 CRT 논쟁이 커지면서 이번 이슈는 ‘전국적인 논쟁’으로 떠올랐다. 미 정치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중도층 조차도 ‘백인들은 기본적으로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민주당 일각의 극단적인 주장엔 동의하지 않고 있다”며 “’미국은 인종차별 국가가 아니다’라는 문구가 향후 선거에서 공화당의 ‘주문’이 될 것”이라고 했다.

실제 영킨 후보도 이 ‘교육’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고들면서 지지율을 크게 끌어올렸다. 그는 지난달 14일 유세에서 “미 전역의 학부모들로부터 문자와 이메일, 전화를 받고 있다”며 “그들은 우리가 그들을 위해 맞서 싸워주길 바라고 있다”고 했다.

선거 전문가들은 “영킨 후보가 ‘백인들의 반발(White Backlash)’의 물결을 타고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미 버지니아 대학 정치센터 소장 래리 사바토는 이날 MSNBC 방송 인터뷰에서 “영킨은 CRT 커리큘럼을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겠다는 공약으로 학부모들의 지지를 얻었다”며 “CRT에서 중요한 단어는 ‘Critical(비판적)’이 아니라 ‘Race(인종)’”이라며 “이 문제는 인종의 문제다. 백인들의 반발, 저항 등 뭐라고 부르든 백인들이 ‘우리가 유권자로서 뭐라도 해야 한다’고 들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했다. 최근 ‘BLM(Black Lives Matter,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등 사회 운동 흐름에 반발하는 모양새다.

이외에도 코로나 장기화 및 ‘2%대’ 성장률 쇼크, 각종 외교 안보 사안 실책 등도 공화당 지지자들이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있는 비판 포인트다.

◇“트럼프는 안된다”

반면 민주당 유권자들은 “트럼프 측근이 이 지역을 차지하는 것은 안된다”고 했다. 42세 케이티 콜린씨는 “지난 1월 의사당이 폭도들에 의해 점령되는 장면을 보고도 공화당을 이 지역에서 인정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말이 안된다”고 했다.

민주당도 이번 선거에서 ‘반(反) 트럼프’ 마케팅에 ‘올인’했다. 바이든 대통령도 지난달 26일 매컬리프 후보에 대한 유세에 나서고 영킨 후보가 트럼프의 공식 지지를 받았음에도 트럼프와 동반 유세를 하지 않는 것을 거론하고 큰 소리로 “그(영킨)가 숨기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트럼프가 부끄러운가”라고 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영킨이) 말하고 싶어하진 않지만, 그는 공화당 후보로 지명되기 위해 도널드 트럼프를 포용했다”고 했다.

그는 이어 “트럼프는 지난 1월 6일 의회 의사당 난입을 선동했다”고도 했다. 트럼프와 영킨 후보를 동일 선상에 놓고 당시의 혼란상을 상기시켜 지지 흐름을 민주당 쪽으로 가져 오겠다는 전략이다.

1일(현지 시각) 버지니아 주지사 민주당 후보인 테리 매컬리프 전 주지사가 리치먼드에서 열린 유세에서 지지자들에 연설하며 술잔을 들어 올리고 있는 모습./AP 연합뉴스

바이든 행정부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목소리도 강하다. 민주당이 워싱턴DC와 바로 붙어 있는 버지니아를 수성할 경우 바이든 대통령의 인프라·사회복지 법안 추진에 탄력이 붙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영킨 후보가 강간 등을 제외하고 20주 이후 낙태를 반대하며 일부 낙태 규제 법안에 찬성하는 것에 대해 여성 유권자층은 반대하고 있다.

◇역대급 조기 투표 비율, 4년 전 비해 6배

양당 모두 선거 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가운데, 이번 주지사 선거 조기 투표율은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버지니아주에 따르면 최소 113만7656명의 유권자가 조기 투표를 마쳤다. 버지니아 전체 인구는 지난해 기준 863만1300여 명, 이 중 유권자 수는 597만5600여 명이다. 전체 유권자의 5분의 1가량이 조기 투표를 한 셈이다.

지난 2017년 버지니아 주지사 선거 당시에는 최소 18만9891명이 조기투표에 참여했다. 4년 전과 비교해 무려 6배가량의 유권자가 조기투표에 나선 것이다. 이번 주지사 선거 조기투표는 지난 9월17일부터 10월30일까지 진행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