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9일 오전(현지 시각) 미국 뉴욕시의 창고형 할인 매장 코스트코. 평소 두루마리 화장지와 키친타월이 진열돼있던 매대가 텅텅 비어 있었다. ‘고객 1인당 휴지 한 팩만 사갈 수 있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지만 남아 있는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당황한 고객들은 두리번거리다 몇 개 남지 않은 갑티슈를 집어들거나 발길을 돌렸다.
유통업체 월마트와 타깃 등에서도 생필품들이 한번 동 나면 물건이 채워지지 않고 매대가 며칠씩 텅텅 비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애플 공식 홈페이지에는 신형 스마트폰인 ‘아이폰 13프로’의 배송 기간이 3~4주 소요된다는 알림 문구가 떴다. 기자는 최근 약 2달러(2300원)짜리 유치원생용 그림 일기장을 사려고 뉴욕 시내 일대 대형 매장과 문구점을 뒤지다 수소문 끝에 30여㎞ 떨어진 뉴욕 롱아일랜드 문구점까지 가기도 했다. 기자가 사는 아파트 앞집에 지난 8월 이사 온 이웃은 한 달 넘게 텅 빈 집에서 각종 일회용품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플로리다주에서 이삿짐을 부쳤는데 중간 단계에서 화물차 배정이 안 돼 이삿짐이 못 오고 있다”고 했다. 또 다른 이웃은 “지난 6월 애리조나주 업체에서 온라인 구매한 가방을 석 달 만에 받았다”고 했다.
최근 휴지·생수·세정제부터 반도체⋅스마트폰⋅자동차에 이르기까지 각종 물품 부족 현상과 이에 따른 가격 폭등, 물류 대란으로 미 전역과 세계 각국이 몸살을 앓고 있다. 중국 광군제(11월 11일)와 미국 블랙프라이데이(11월 26일), 크리스마스로 이어지는 연말 대형 소비철이 다가오면서 최악의 인플레이션·물품 부족난이 벌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급격히 커지고 있다.
이번 가격 폭등과 물품 부족 현상 등은 최근 몇 년 새 보호·고립주의가 퍼진 가운데 코로나 팬데믹이 덮치면서 황폐해진 각국 경제·산업계의 가장 취약한 고리가 붕괴하면서 발생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글로벌 경제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는 미국의 물류 대란이 대표적이다. 미국은 지난봄부터 코로나 백신 보급으로 경제가 재개되며 수요는 정상화됐지만, 물류 현장에선 각종 방역 규제와 구인난 등으로 병목현상이 누적됐다. 물건이 있어도 이를 옮기고 배달할 사람과 운송 수단이 부족해졌다. 사람들이 갈수록 비대면 온라인 쇼핑과 택배에 점점 더 의존하면서 물류난은 더욱 심화됐다.
CNBC 등에 따르면 미국의 대표 수입 물류 창구인 서해안의 LA항과 롱비치항엔 현재 컨테이너 수만개가 쌓여 있고, 70척 이상의 화물선이 바다에서 입항을 기다리고 있다. 선박이 항구에 정박할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은 평균 9일, 최대 3주에 달한다. 글로벌 해운 운임의 대표 지표인 상하이컨테이너운임지수(SCFI)는 지난해부터 계속 상승, 현재 통계 집계가 시작된 2009년 이래 최고치를 기록 중이다. ‘미 경기 동향 풍향계’로 불리는 물류 업체 페덱스는 최근 “노동력 부족으로 타격을 받고 있다”며 물류 가격을 8%까지 올렸고, UPS도 가격 인상 대열에 동참했다.
국제해운회의소와 국제항공운송협회, 국제도로운송연합 등 교통·물류 관련 노동자 6500만명이 소속된 단체들은 29일 유엔총회에 참석한 각국 정상에게 공개 서한을 보내 “우리는 팬데믹 중에도 세계 공급망이 중단되지 않도록 쓰러져가면서 버텨왔지만 이제 한계에 도달했다”고 했다. 이들은 물류량 증가에도 항구·공항 등이 자주 폐쇄되고 국가별 백신 접종과 방역·격리 규제가 제각각이어서 근로조건이 악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영국은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의 부메랑을 맞고 있다. 그동안 대형 트럭 운전은 주로 동유럽 출신들이 맡았는데, 이들이 브렉시트로 영국을 떠나면서 휘발유와 각종 물품 수송이 큰 차질을 빚고 있다. 주유 대란으로 암 환자 등 응급 환자를 이송할 구급차 운행이 지연되자 치료를 연기하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영국 정부는 급히 군 운전병 150명을 훈련시켜 연료 수송 등에 투입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말레이시아⋅필리핀⋅인도네시아⋅베트남 등 동남아 지역에서는 코로나 확산으로 공장 문을 닫으면서 차량용 반도체와 각종 소비재 등의 생산 일정에 큰 차질을 빚고 있다. 이 여파로 미국과 유럽, 아시아 각국이 연쇄적으로 생산과 소비에 타격을 입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