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무장조직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항복을 받아낸 15일, 수도 카불의 하미드 카르자이 공항 주변은 절규하는 난민들로 가득 찼다. 미군이 아프간 정부군에 지원했던 블랙호크 헬기를 비롯한 주요 시설엔 탈레반 깃발이 나부꼈다. 하지만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대통령 휴양 시설인 캠프 데이비드에 머물며 반팔 폴로 셔츠 차림으로 화상회의를 주재했다. 미 국무부·국방부는 주아프간 미국 대사관의 모든 인력이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 부지로 안전한 철수를 완료했고, 미군 6000명이 이들을 보호하고 있다고 밝혔다.
국제사회에서는 바이든 행정부의 이런 처사가 해외 주둔 미군 철수를 강력히 주장하며 국제사회에 무관심했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와 다를 바 없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도 ‘국내 여론’을 우선한다는 것이다. 미 싱크탱크 시카고카운슬이 지난달 7~26일 미국민 2086명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0%는 주아프간 미군 철수를 지지했다. 내년 중간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아프간 전쟁을 신속하게 끝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미국 언론은 보고 있다.
국제전략연구소(ISS)의 프랑수아 하이스버그 선임 고문은 영자지 저팬타임스에 “(바이든 행정부가) ‘미국이 돌아왔다(America is back)’고 말할 때 이제 많은 사람은 ‘그렇다, 미국은 집으로 돌아갔다’고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도 언론인 데바시시 로이-초우두리는 이날 시사주간지 타임에 “미국의 무책임한 아프간 포기는 아시아에서 미국의 리더십을 다시 주장하며 역내 국가들에 중국과의 초강대국 간 경쟁에서 미국 편을 들려고 설득하려고 할 때 일어났다”며 “아프간이란 강력한 예시는 중국을 아주 편하게 해줄 것”이라고 했다.
최강 아산정책연구원 부원장은 “현지 정부가 동맹의 역할을 못할 때 언제든 철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며 “한국이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 등에서 동맹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달 8일 아프간 철군을 정당화하는 연설에서 “우리는 아프가니스탄에 ‘국가 건설(nation-build)’을 하러 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미국은 오사마 빈 라덴을 포함해 9·11 때 미국을 공격한 테러리스트들을 잡기 위해 아프간에 갔고 그 목적을 성취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프간전을 시작한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2002년 4월 버지니아군사대학 연설에서 “평화는 아프간이 안정된 정부를 수립하도록 도울 때 성취될 것”이라며 아프간을 “(탈레반이란) 악에서 자유롭고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것”을 돕겠다고 했었다.
많은 전문가는 이 공약을 계속 이행하기에 반미(反美) 감정이 강하고 부정·부패가 만연한 아프간의 상황이 좋지 않았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국제사회에 내세웠던 약속을 뒤집는 과정이 일방적이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박인휘 이화여대 국제학부 교수는 “중동·유럽 동맹과 충분히 상의하지 않은 점은 바이든 외교답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은 앞으로 아프간에 들어설 정권이 국제사회 규범을 따르도록 만드는 노력을 충분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사태가 한미동맹에 적지 않은 시사점을 준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빅터 차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부소장은 본지에 “아프간 철군이 미국의 대한 방위 공약의 신뢰성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서도 “한반도의 현상이 바뀌면 미국의 여론도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예를 들어 트럼프가 한국의 ‘평화 정권’에 동의해 미군을 철수하려 했다면 ‘가짜 평화’라도 미국 내엔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에번스 리비어 전 국무부 수석부차관보는 본지에 “북한은 아프간의 교훈을 한국에 적용하려 시도하며 한국 내 분열을 획책하고 한·미 동맹을 약화하며 미군의 한국 내 주둔 근거를 약화시키려는 노력을 배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 국방부가 아프간 미군 철수에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지면서 바이든 대통령의 결정에 대한 비판은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미 국방부는 당초 바이든 대통령이 트럼프 전 대통령의 아프간 철군 결정을 번복해 소규모 대테러 부대라도 몇 년 더 주둔시킬 것을 바랐다고 한다. 하지만 오바마 행정부 시절부터 아프간 주둔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바이든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아프간 철수 과정에서 미국 정보 당국의 ‘정보 실패’가 노출된 것도 미국의 이미지엔 큰 타격이 될 전망이다. 미 정보 당국은 6월 말까지 카불 함락 시점을 미군 완전 철수 후 18개월 정도로 예상했다. 이들의 예측을 토대로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달 8일 아프간 관련 연설에서 “탈레반은 월맹군이 아니다. 역량이 그에 훨씬 못 미친다”며 “주아프간 미국 대사관의 지붕에서 사람들이 (헬리콥터로) 구조되는 모습을 보게 될 상황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탈레반이 아프간 전역을 장악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도 했다.
그런데 탈레반의 공세가 대폭 강화된 지난달 중순 들어 정보 기관들은 ‘90일(3개월) 이내'에 아프간 정권이 무너질 수 있다며 그 시한(時限)을 줄이기 시작했다. 카불 함락 불과 며칠 전 백악관, 국방부 및 정보 기관 고위 관리들은 미 언론들을 통해 “이르면 한 달 이내 (카불의) 함락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CIA(중앙정보국), NSA(국가안전보장국) 등의 정보 당국과 이들을 총괄하는 최고 정보 기관인 DNI(국가정보국)까지 총 17개 기관이 막판까지 반군(叛軍) 및 아프간 정부군의 능력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탈레반이 카불로 진입하자, 미군은 치누크 헬기를 카불 주재 미 대사관 옥상에 보내 외교 인력을 탈출시켜야 했다. 바이든 대통령이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 지 37일 만의 일이었다. 중국 관영 환구시보의 후시진(胡錫進) 총편(편집인)은 이날 “대만 독립분자들은 똑똑히 보아라”라며 “어제는 사이공, 오늘은 카불, 내일은 타이베이(가 버려질 것)”라며 조롱하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도 이날 CNN 인터뷰에서 “그것(붕괴)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빠르게 일어났다”며 정보 실패를 인정했다.
“탈출 비행기에 매달렸다 추락… 여성들은 대학졸업장부터 숨겨”
16일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의 관문인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은 새벽부터 내·외국인 수천명이 몰리면서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돌변했다.
항공기 트랩에는 서로 먼저 타려는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며 매달리다가 떨어지기도 했다.
공항 주변 도로는 수백 대의 차량이 엉키면서 마비가 됐다. 이런 장면은 장년층에게 1975년 남베트남 패망 당시를 떠올리게 했다.
미국이 대사관을 옮긴 카불 공항에서 미군이 총을 쐈다는 목격담과 외신 보도도 잇따랐다. 이날 CNN은 “미군이 무장 병력 2명을 사살했다”고 보도했고, 영국 일간 가디언도 “카불 공항의 미군이 총격 사실을 시인했다”고 전했다. 한 트위터 이용자는 “시민들이 패닉에 빠져 공항을 향해 달려가고 미군은 시민들이 흩어지도록 하늘로 총을 발사했다. 이런 모습을 보는 게 정말 슬프다”고 썼다. 로이터통신은 목격자를 인용, 이날 공항에서 최소 5명이 숨졌다고 했다. 사망자가 압사에 의한 것인지, 총격에 의한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륙을 위해 공항 활주로로 이동하기 시작한 미 군용기에 주민 여러 명이 매달려 있는 아찔한 장면이 담긴 동영상도 소셜미디어에 올라왔다.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이 누구도 예상치 못한 빠른 속도로 아프간 전역을 장악하면서 현지 시민들은 경악과 공포에 휩싸였다. 탈레반은 이날 “아프간에서 전쟁은 끝났다”고 선언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15일 밤 탈레반이 장악한 수도 카불 현지 표정에 대해 “기이할 정도로 황량한, 버려진 도시 같다”고 했다. 겁에 질린 현지 주민 대부분은 집 안에 틀어박혀 숨죽인 채 탈레반의 입성을 지켜봤다고 한다. 부랴부랴 귀가하려는 사람들 때문에 이날 오후 시내 택시는 모두 만차였고, 기사들은 평소의 5배가 넘는 금액을 불렀다고 한다. 은행과 식료품점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섰다. 긴급 상황을 대비해 현금을 찾고, 비상 식량을 사재기하는 행렬이 이어졌다. 카불 시내의 밀가루 가격은 며칠 새 40~50%가량 급등했다.
누구보다 여성들의 공포는 극에 달했다. 탈레반은 과거 집권 당시 여성 교육 금지, 취업 활동 제한, 부르카(눈을 망사로 덮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리는 복장) 착용 강제 등 극단적 이슬람 율법을 강요하며 여성 인권을 사실상 박탈했다.
탈레반은 카불에 입성하면서 “히잡을 쓴다면 여성은 학업 및 일자리에 접근할 수 있다”고 했지만, 이를 믿는 주민들은 없다. 카불이 함락된 뒤 일부 여성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대중교통과 차량을 이용하려 했지만 거절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여성을 차량에 태운 것으로 탈레반의 오해를 살까 봐 운전수들이 애초에 여성 탑승을 거절했다는 것이다. 한 20대 여성은 가디언에 “내가 집에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신분증과 대학 졸업증을 숨긴 것”이라고 말했다. 탈레반이 금기시해온 ‘교육받은 여성’으로 낙인찍혀 탄압받을 것을 우려한 것이다. 블룸버그통신은 “탈레반의 집권이 가시화되면서 일부 지방에서는 한동안 팔지 않던 부르카 판매를 시작했고, 수요가 급증하면서 가격도 오르고 있다”고 보도했다.
현지 톨로뉴스TV 대표인 로트풀라 나자피자다는 이날 카불 시내를 찍은 사진 한 장을 트위터에 올렸다. 히잡을 쓰지 않은 여성이 그려져 있던 벽화를 한 남성이 흰 페인트로 칠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이에 대해 “이미 현지 방송에서 팝(대중음악)과 여성이 사라졌다” “카불에서 지옥이 펼쳐질 것” “비극이다”라는 반응도 달렸다.
국가 지도자로부터 버림받은 국민은 모든 희망을 잃은 듯 자포자기했다. 아프간 정부군이나 나토군으로 복무했거나 미국에 협력했던 이들도 불안에 떨고 있다. 정부군과 친정부 민병대는 탈레반이 카불에 진입하자 보복을 우려해 지체 없이 군복을 벗어던졌다. 카불에 앞서 함락된 아프간 제2 도시 칸다하르에서는 탈레반이 민가를 이 잡듯이 뒤지며 정부군 및 협력자 숙청을 진행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카불 주민들은 “머지않아 탈레반이 ‘배신자’를 색출해 숙청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