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미국 시카고 중심가 매그니피센트 마일의 브룩스 브라더스 매장 쇼윈도 모습. 200년 넘게 미 대통령과 유명 고위인사들, 명문 사립학교의 옷을 만들어온 '아메리칸 클래식'의 상징인 이 브랜드에서 현재 유일하다시피한 노세일 품목은 '추리닝'이다. /AP 연합뉴스

지난 주 뉴욕 맨해튼 6번가의 양복점 ‘브룩스 브러더스’ 매장. 19세기부터 200여 년간 링컨, 케네디, 트럼프 등 역대 미국 대통령 40명의 취임식 예복을 만든 이 양복점이 쇼윈도에 트레이닝복 상하 세트를 진열한 것을 보고 신기하다는 생각에 들어가봤다.

이 브랜드의 대표 상품인 남성 양복과 넥타이는 매장 뒤편에서 70~80% 할인 중이고, 드레스 셔츠는 50~60%, 여성 투피스 정장과 하이힐 구두도 60~70% ‘폭탄 세일’ 중이었다. 매대 중앙을 점령한 건 스웨트팬츠·조거팬츠 등으로 불리는 ‘추리닝’과 면 티셔츠들이었다.

추리닝 상·하의는 각각 118달러(약 13만5000원)로, 전문직 종사자들이 드레스 셔츠에 새겼던 이름 이니셜 자수를 넣으면 130달러씩이라고 했다. 할인은 없었다. 이니셜 박힌 추리닝 세트가 260달러(약 30만원)인데, 판매 직원은 “인근 직장인들에게 이게 제일 인기가 많다”고 했다. 브룩스 브러더스는 지난해 팬데믹으로 인한 경제 봉쇄 직격탄을 맞아 파산해 유통 대기업에 매각된 뒤 주력 상품을 간편복과 마스크 등으로 바꿨다.

세계 최대 소셜미디어 페이스북의 한 직원이 지난해 집에서 아이를 돌보며 근무하고 있다. 팬데믹이 장기화되면서 재택 근무도 뉴노멀이 되고, 기존의 '오피스룩'은 편하고 신축성 있으며 세탁소에 맡길 필요가 없는 옷으로 대체되고 있다. /페이스북

미국에 1년 넘게 살면서 폴로랄프로렌⋅타미힐피거 등 중·고가 브랜드의 주력 상품이 된 ‘고급 추리닝’은 할인 행사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할인을 안 해도 너무 잘 팔리기 때문이다. 집에서 근무하는 직장인들이 ‘편하면서도 어느 정도는 긴장감이 느껴지는’ 품질 좋은 옷, 일하다 동네에 맥주를 사러 나가도 이상하지 않은 옷에 대한 수요가 폭발했다. 기존 사무실 패션의 정석이었던 셔츠와 재킷은 동료·거래처와 화상회의할 때 잠깐 걸치는 옷이 됐다.

직장인들이 드라이클리닝과 다림질을 해야 하는 양복 대신 집에서 물빨래 가능한 옷들만 입자, 영업난에 빠진 뉴욕의 세탁소들은 일제히 ‘세탁 후 개어주기’ 서비스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지난 7월 뉴욕 월스트리트의 증권거래소 앞을 인근 직장인들이 지나가고 있다. 팬데믹 이전 정장을 갖춰입었던 이들은 이제 티셔츠와 면바지, 운동화나 로퍼 등이 새로운 출근 복장이 됐다. /EPA 연합

일부 기업이 출근을 재개했지만 재택근무에 초점을 둔 ‘팬데믹 패션’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월스트리트의 금융사와 로펌에서도 딱딱한 슈트는 사라지다시피 했다. 요즘 월가에서 점심 먹으러 나오는 인근 직원들을 보면 반팔 폴로 티셔츠에 면바지, 로퍼(끈 없는 구두)나 운동화 일색이다. 기존의 ‘금요일 캐주얼’이었던 노타이에 단추 푼 셔츠조차 고지식해 보일 정도다. 최근 만난 한 여성 대형 로펌 변호사는 풍성한 셔츠에 ‘요가복의 샤넬’이라는 룰루레몬 레깅스를 받쳐 입었다.

구글과 페이스북 등 빅테크와 골드만삭스, JP모건, 웰스파고 등 금융사들은 델타 변이 확산에 따라 전 직원 대면 출근 계획을 가을 이후나 내년 초로 미루고 있다. 간편복을 필두로 한 오피스룩의 진화는 계속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