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터키의 전신인 오스만튀르크 제국이 106년 전 저지른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집단 학살(genocide)’로 공식 규정했다. 이에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한 세기에 걸친 논란을 제3자가 정치화해 터키에 대한 간섭의 도구로 이용하려 하고 있다”며 반발했다.
오스만 제국은 접경국인 동유럽의 소국 아르메니아 일부를 점령하고 있었는데,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기에 러시아와 각축전을 벌일 때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군에 참여하자 ‘반역’을 이유로 탄압했다. 역사학계는 1915~1923년 아르메니아에서 150만여명이 사망했고, 이후 50만명이 미국·소련 등으로 망명한 것으로 추산한다. 그러나 터키는 이 사건이 전쟁 중 벌어진 쌍방 충돌이자 아르메니아 내전의 결과일 뿐이라고 주장해왔다.
바이든 대통령은 24일(현지 시각) 아르메니아 집단 학살 추모일을 맞아 발표한 성명에서 “매년 이날 우리는 오스만 시대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로 숨진 이들의 삶을 기억하고, 이런 잔혹 행위가 되풀이되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한다”고 밝혔다.
역대 미 대통령들은 아르메니아계 미국인들의 요구를 수용해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을 인정하겠다고 공약하고 당선됐으나, 실행한 이는 거의 없었다. 바이든 이전엔 1981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집단 학살로 언급했다. 터키는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일원으로 미국의 중동·남유럽 안보 전략을 떠받치는 파트너이자, 이라크·아프간 등에서 미국과 대테러전을 함께 치른 혈맹이다. 그런데도 바이든이 40년 만에 ‘집단 학살’이라는 용어를 다시 꺼낸 것이다.
이와 관련, 뉴욕타임스는 “아르메니아 집단 학살 인정은 바이든 정부의 ‘인권 중시 외교’ 원칙을 내세우기 좋은 소재”라고 했다. 바이든이 공개적으로 언급하면서 중국·러시아 등을 포위할 가치 수단인 인권을 내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전 미 대통령과 밀착해 친(親)러시아 정책을 펼친 데다, 독재를 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것도 바이든 정부의 판단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란 분석이다.
미국과 유럽 등 서방 국가들이 아르메니아 대학살에 100년 넘게 관심을 갖는 주된 이유는 ‘기독교도가 무슬림에 의해 떼죽음을 당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아르메니아는 유럽에서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정한 나라다. 또 오스만 제국의 박해를 피해 서방으로 피신한 아르메니아계 후손들이 줄기차게 이 문제를 거론해온 것도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