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년자를 상대로 성범죄를 저질렀던 미국의 억만장자 제프리 엡스타인과 관계를 맺었던 각계 유력 기관과 거물들이 최근 잇따라 철퇴를 맞으며 미 엘리트 사회를 흔들고 있다. 엡스타인은 10대 여성 최소 36명에 대한 인신매매와 성 착취 혐의로 수감돼 있다가 2019년 자살했다. 하지만 뉴욕 연방검찰과 연방수사국(FBI)이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한 수사를 끈질기게 이어오고 관련 보도가 나오면서 그의 주변 인물들에게 계속 불똥이 튀고 있는 것이다.
세계 예술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리언 블랙(69) 이사회 의장은 28일(현지 시각) 오는 6월 차기 의장 선거에 재출마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현대미술관 이사회 의장은 ‘미술계의 왕좌’로 일컬어지는 자리로, 블랙이 취임 3년 만에 불명예 낙마하면서 미술관의 명성도 타격을 받았다. 블랙은 자신이 세운 500조원대 자산운용사 아폴로 글로벌 매니지먼트의 최고경영자직에서도 사임했다.
블랙은 20여년간 엡스타인과 친분을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그는 엡스타인에게 각종 명목으로 모두 1억8800만달러(약 2128억원)를 건네는 등 석연치 않은 거액의 돈거래를 했다는 사실이 올 초 뉴욕타임스 보도로 드러났다. 당초 블랙은 “엡스타인이 부동산과 절세 관련 조언을 해준 덕에 20억달러(약 2조2000억원)의 이득을 보게 돼 답례했다”고 했지만, 내막을 아는 월가에선 “허무맹랑한 소리”란 비난이 나왔다. 블랙이 엡스타인을 통해 유력 정치인 등에게 뇌물을 줬을 가능성이 크며, 엡스타인이 여러 은밀한 거래 등을 통해 부와 인맥을 쌓았다는 걸 몰랐을 리 없다는 것이다.
미 최고 명문 하버드대도 지난 27일 엡스타인에게서 기부금 650만달러(약 73억원)를 받은 ‘진화 역학’이란 연구 프로그램을 폐지했다. 또 이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엡스타인을 하버드대 동문인 것처럼 소개하고 다닌 수학과 마틴 노웍 교수를 해임했다고 밝혔다. 앞서 하버드대는 법조계 저명인사인 앨런 더쇼비츠 로스쿨 교수가 2008년 엡스타인이 처음 성범죄로 기소됐을 때 변호해 특혜성 형량을 받게 해주고, 성 접대도 받은 것으로 드러나 이미지에 먹칠을 한 상태다. 엡스타인에게서 170만달러(약 20억원)를 받은 MIT 미디어연구소 소장인 세스 로이드 기계공학과 교수도 최근 사임했다.
앞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차남인 앤드루 왕자(61)는 엡스타인과 어울리며 미성년자 성 접대를 받았다는 의혹으로 2019년 공직에서 사퇴했다. 엡스타인 고소인인 버지니아 로버츠 주프레(36)가 “17세 때 런던과 뉴욕 등에서 앤드루 왕자와 강제로 성관계를 맺었다”고 폭로했고,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도 공개됐다. 미 법무부는 이후 앤드루 왕자 소환을 수차례 요구했지만 왕실은 침묵했다. 앤드루와 함께 엡스타인의 별장 파티에 자주 참석한 영화감독 우디 앨런도 수사 선상에 올라있다.
엡스타인은 뉴욕대를 중퇴하고 수학 교사를 거쳐 투자은행에서 일하다, 1990년대부터 사모펀드를 세워 정·재계와 문화계, 학계 저명인사들의 자산 관리를 도왔다. 아동성애자인 엡스타인은 20여년간 뉴욕 저택과 플로리다 팜비치, 버진아일랜드의 별장에 10대 소녀들을 “모델 시켜주겠다” “대학 보내주겠다”며 유인해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성 노리개로 삼았고, 유력 인사 상당수에게도 성 상납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는 수사망이 조여오던 2018년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권력층 인사들의 성적 기벽과 마약 전력을 많이 알고 있다”며 관련 사진과 기록을 남겨뒀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66세이던 2019년 8월 맨해튼 교도소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 이후 수사가 상당한 차질을 빚으면서 피해자들이 분노했다. 미국에선 범죄 용의자의 자살을 ‘죗값을 치르지 않고 진실을 은폐하는 행위’로 보는 정서가 강하다.
검찰과 FBI는 엡스타인의 전 여자친구이자 그에게 성범죄 대상을 알선한 영국 사교계 명사 지슬레인 맥스웰(59)을 체포,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회장, 제프 베이조스 전 아마존 회장,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 왕세자 등이 엡스타인과 어울린 것으로 알려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