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인 25일(현지 시각) 아침 차량 폭발 사건이 발생한 미국 테네시주 내슈빌 도심 한복판이 아수라장으로 변해 있다. /AP 연합뉴스

크리스마스인 지난 25일 아침 6시 30분(현지 시각) 미국 남동부 테네시주 주도 내슈빌에서 차량 폭발 사건이 발생했다. 시내 한복판의 건물 40여 채와 주차된 자동차들이 파괴되고, 가로수가 잿더미로 변했다. 성탄절 대형 테러의 전조일지 모른다는 공포가 덮쳤다.

그런데 이 폭발 사건엔 이상한 점이 있었다. 세 명이 부상을 입었을 뿐, 인명 피해가 거의 없었다. 인적이 드문 새벽이었고, 폭발한 캠핑용 차량(RV)에선 폭발 15분 전부터 “폭발물이 곧 터지니 빨리 대피하라”는 안내 방송까지 흘러나왔다. 사람을 노린 범죄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수사 당국은 폭발 현장에서 발견된 유해의 DNA를 분석한 결과, 용의자이자 RV 소유주인 앤서니 퀸 워너(63)가 현장에서 혼자 자폭한 것으로 보인다고 27일 밝혔다. 백인 남성인 워너는 컴퓨터 등 정보통신 기술(IT) 관련 계약직 업무를 해왔으며, 전과나 정신병력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국은 그의 단독 범행으로 잠정 결론을 내렸다.

25일 미 테네시 내슈빌 차량 폭발 현장에서 자폭한 용의자 앤서니 워너(63).

그럼 그는 무엇을 노린 것일까. NBC와 현지 매체들에 따르면, 연방수사국(FBI)과 경찰은 그가 5세대 이동통신(5G) 관련 음모론에 빠져 있었을 가능성을 집중 조사하고 있다. 폭발 현장 바로 앞에 미 최대 통신사인 AT&T 건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존 쿠퍼 내슈빌 시장도 언론 인터뷰에서 “워너의 목표물은 AT&T 시설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실제 이 폭발 여파로 테네시와 인근 켄터키주 일대까지 통신이 한동안 마비됐다가 복구됐다.

‘5G 음모론’은 코로나 확산이 각국 5G 통신망 확대와 연관돼 있다는 것이다. 바이러스인 코로나가 무선 주파수인 5G를 타고 온다거나, 5G의 특정 주파수가 면역력을 약화시키고 호흡기를 공격해 코로나 감염에 취약하게 만든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이 음모론은 2019년 말 중국 우한 등에서 5G 통신망이 급속히 확대될 때 코로나가 퍼지기 시작한 시점과 맞물리면서 소셜미디어를 타고 세계에 번졌다. 지난 4월 영국과 네덜란드에서 5G 기지국 100여 곳이 시민들 공격을 받아 불타기도 했다.

미국에선 5G 음모론이 주로 ‘큐어논(QAnon)’ 같은 극우 음모론 집단과 결탁해 퍼졌다. 큐어논은 극우 사이트에서 음모론을 주창하는 익명(Anonymous)의 네티즌 ‘Q’에서 따온 이름이다. 큐어논은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아동 성매매 조직이 정부와 대기업까지 잠식했고, 트럼프 대통령이 이들을 처단할 난세의 영웅’이라고 믿는 단체로, 지난 대선에서 위세를 떨쳤다. 트럼프 정부가 5G 선두 주자인 중국 화웨이를 때린 것도 이런 음모론에 불을 붙였다.

독일 베를린에 있는 영국 통신사 보다폰의 5G 기지국. 올초 코로나 바이러스가 확산되자 영국 등 유럽에서 5G가 코로나와 관련돼있다는 음모론이 확산되면서 기지국 방화 사건이 잇따랐다.

특히 백인 인구 비중이 높은 테네시는 5G 음모론의 온상으로 지목돼왔으며, 올해 5G 기지국에 대한 방화 시도가 수차례 이어졌다. 이번 내슈빌 폭발에 수사 당국이 처음부터 ‘5G’를 거론한 것은 이 때문이다. 뉴스위크는 27일 “각 주정부와 대도시는 통신 지국과 정부 건물, 대형 병원 등을 대상으로 5G 음모론 추종자들이 내슈빌 모방 범죄를 일으킬 가능성에 대비해 경계에 돌입했다”고 전했다. 현재 페이스북과 유튜브 등에서도 5G 음모론 관련 콘텐츠가 ‘허위 정보’로 차단되고 있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워너가 범행 직전 틀었던 1960년대 히트한 팝송 ‘다운타운(Downtown)’도 주목받았다. 워너의 RV에선 폭발 예고 방송 도중 갑자기 “불빛이 밝게 빛나는 곳, 모든 근심 잊을 수 있는 다운타운으로 가요”란 가사를 담은 흥겨운 노래가 잠시 흘러나왔다. 그 뒤 차가 바로 폭발했는데, 경찰이 가사를 토대로 55년 전 페툴라 클라크의 노래임을 알아냈다고 한다. 미 네티즌은 ‘다운타운’이 1991년 베트남전을 소재로 한 영화 ‘최후의 출격(Flight to the Intruder)’에서 미군이 베트콩 미사일 기지를 공격하는 장면에서 배경 음악으로 쓰였다고 했다. 다만 이 음악이 사건과 관련해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