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오전 11시 24분(현지 시각) 미 언론들이 일제히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의 당선을 속보로 타전하고 있을 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골프를 치고 있었다. 그리고 이날 그는 종일 침묵에 가까운 시간을 보냈다. 대선 승복의 기미는 만 하루가 되도록 보이지 않고 있다.
백악관 공동취재단에 따르면 트럼프는 이날 오전 10시 40분쯤 백악관에서 가까운 버지니아주에 있는 본인 소유 ‘트럼프 내셔널 골프클럽’에 도착했다. 그는 선거 슬로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가 박힌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평소 즐겨 쓰던 빨간색이 아니라 보기 드문 흰색이었다. 트럼프는 최근 코로나 확진과 유세 일정 등으로 한동안 좋아하는 골프를 하지 못하다, 이날 모처럼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는 라운딩을 마친 뒤 오후 4시쯤 백악관으로 돌아갔다. 백악관 주변은 바이든 승리를 축하하러 쏟아져 나온 인파로 가득했다. 이들은 트럼프가 탄 차량을 향해 “넌 해고야(You`re fired)!” “패배자(loser)” “짐 싸서 집에 가”란 야유를 퍼부었다. ‘넌 해고야’는 트럼프가 정계 입문 전 TV 리얼리티쇼 ‘어프렌티스’에서 히트시킨 유행어이고, ‘패배자’는 트럼프가 누군가를 모욕할 때 즐겨 쓰는 말이다.
트럼프는 미국 역사상 많지 않은 단임(單任) 대통령의 기록을 세우게 됐다. 트럼프에 앞서 미 대통령 44명 중 재선에 도전했다 실패한 사람은 10명뿐이며, 가장 최근의 경우는 28년 전 1992년 조지 H W 부시 전 대통령이었다. 웬만하면 현역 대통령의 재선을 허락하는 미국에서 ‘단임 대통령’이란 이름은 치욕이나 다름없다.
아직 트럼프 캠프와 백악관은 패배의 현실을 공식적으론 전혀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다. 트럼프 대통령은 7일 내내 침묵하다 오후 6시쯤 “개표 현장에 참관인이 들어가지 못했다. 나는 합법적인 7100만표를 얻어 선거에서 이겼다.” “합법 투표 7100만표. 현직 대통령으로선 최다 득표!”란 내용의 트위터를 두 건 올렸다. 그러나 트럼프가 대선일 이래 줄기차게 기자회견과 트위터를 통해 “선거가 조작됐다. 대법원에 소송하겠다” “바이든은 거짓으로 승자 행세 하지 말라”고 불복을 예고하던 것에 비해선, 그 수위가 다소 낮아졌다는 말도 나왔다.
트럼프 대통령의 가족과 참모·지인들은 주별 재검표와 무효 소송을 포기하지 말라고 계속 부추기는 것으로 알려졌다. 폭스뉴스는 7일 트럼프의 측근 소식통들을 인용, “트럼프가 제기한 소송에서 모두 패소해 선거 결과를 뒤집을 수 없다는 점이 명확해지면 승복하고 평화적 정권 이양을 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특히 딸 이방카는 지난 6일까지 “불법적인 표를 세선 안 된다”며 개표 중단 주장을 했으며, 장남 도널드 트럼프 주니어와 차남 에릭은 “공화당 의원들이 부정선거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이 세 자녀는 모두 트럼프 대통령의 직을 이용해 사업적 이익을 취해 왔다는 논란을 낳았다. 트럼프 퇴임 후 직접 소송 대상이 되는 등 큰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전망이다. 에릭은 트럼프 재단의 탈세 의혹을 수사 중인 뉴욕 검찰 소환을 거부해왔다.
아직 백악관과 바이든 당선인 간 접촉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통상 현역 대통령은 정권이 바뀌게 되면 즉시 대통령 당선인을 백악관으로 초청해 정권 인수 작업을 공식화한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도 2016년 대선 다음 날 트럼프와 단독 면담했다. 이런 장면은 트럼프가 백악관에서 나갈 때까지 아예 못 볼 가능성도 있다.
최측근 참모 그룹이 대통령에게 조기 승복 선언을 권유하며 ‘출구 전략’을 찾기 시작했다는 말도 나온다. CNN은 7일 최대 실세인 사위 재러드 쿠슈너 백악관 선임보좌관이 선거 결과를 인정하는 문제를 논의하려고 대통령과 접촉했다고 보도했다. 로이터통신은 마크 메도스 백악관 비서실장, 마이크 펜스 부통령, 퍼스트레이디 멜라니아 등이 트럼프에게 승복 문제를 고언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목했다.
일각에선 트럼프에게 이번에 확인된 막강한 지지층을 기반 삼아 2024년 대선 때 재도전하라고 권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 헌법상 대통령 임기는 두 번으로 제한돼 있지만, 연임(連任)이어야 한다는 규정이 없어 4년 뒤 트럼프의 출마는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