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의 콜럼버스 동상이 지난 6월 시위대에 의해 '대학살 기념을 중단하라'는 문구와 함께 붉은 페인트를 뒤집어쓴 모습. /abc 뉴스

미국에서 10월의 둘째 월요일인 12일(현지 시각)은 ‘콜럼버스 데이’라는 연방 공휴일이다. 1492년 이탈리아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상륙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그러나 올해 미국에선 이날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유럽·백인 주도의 침략사를 인정하지 말자는 역사 바로세우기 운동이 사회를 휩쓸면서다.

정통 역사가들은 콜럼버스를 위대한 개척 정신으로 미국을 발견했다며 위인의 반열에 올렸다. 그러나 진보 수정주의 역사관으론 그는 순박한 원주민을 학살하고 기독교 개종을 강요하며 노예 무역을 시작하게 한 백인 우월주의의 원흉이다.

보스턴 대학가의 컬럼버스 동상이 지난 6월 목이 잘려 있는 모습. /abc 뉴스

이 논란 때문에 올해 워싱턴 DC와 20여 주(州)는 아예 콜럼버스 데이란 명칭을 버리고, ‘원주민의 날’로 바꿔 기념 행사를 치른다. 원주민의 날은 1992년 캘리포니아의 대학 도시 버클리에서 처음 채택돼 조금씩 영역을 넓히다 올해 확 늘어나게 됐다.

이는 올해 미국을 휩쓴 ‘흑인 목숨은 소중하다’ 시위의 영향이 크다. 이 시위에서 가장 먼저 표적이 된 것이 콜럼버스였다. 명문대가 밀집한 보스턴과 샌프란시스코 등 미 전역에서 콜럼버스 동상의 목이 잘리고, 무너지고, 붉은 페인트를 뒤집어쓰고, 물에 빠졌다.

미 보스턴에서 11일 '콜럼버스 데이' 대체 행사로 열린 '원주민의 날' 퍼레이드가 열리고 있다. /보스턴 글로브

콜럼버스를 둘러싼 역사적 평가가 주별·도시별로 갈리다 보니 이날을 기리는 국민과 그렇지 않은 국민으로 갈린다. 연방 기관은 휴무지만 주 관공서는 휴무가 아닐 수도 있고, 은행은 문을 닫는데 뉴욕증시는 문을 여는 식이다. 지난 주말 미 온라인엔 “콜럼버스가 누군데 학교가 쉬느냐” “문 여는 마트·병원이 어디냐” “12일 쓰레기 수거가 되냐 안 되냐”는 질문이 폭주했다.

예년까지 콜럼버스 데이 사흘 연휴간 월동용품 판촉에 나섰던 미 백화점·마트들도 올해부턴 약속이나 한 듯 ‘콜럼버스’를 입에 올리지 않고 있다. 콜럼버스 데이를 내세웠다가 젊은 소비자들로부터 비난을 들을 수 있어서다. 대신 ‘원주민의 날 세일’이나 ‘가을 세일’로 이름을 바꿨다.

500여 년 전 역사까지 재단하는 이런 극단적 ‘정치적 올바름(PC)’ 운동을 놓고 백인·보수층 다수는 불만을 속으로 삼키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10일 콜럼버스 데이 성명에서 “극단주의자들은 공헌을 실패담으로, 발견을 잔학 행위로, 성취를 침략으로 바꾸려 한다”며 “우리 역사를 보호하고 증오와 분열에 맞서자”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