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 갱단의 발호와 정치적 혼란으로 10년간 선거를 치르지 못한 카리브해 섬나라 아이티의 대선과 총선이 또다시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8일 로이터와 현지 매체 등에 따르면 아이티 임시선거관리위원회(CEP)는 지난 1일 시작될 예정이던 유권자 명부 등록과 후보자 접수 절차를 연기하고, 추후 새로운 일정을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CEP는 오는 8월 대선 1차 투표를 거쳐 필요할 경우 12월 결선 투표를 진행할 방침이었다. 그러나 향후 일정 자체가 불투명해졌다.
선거 일정이 연기된 건 정부의 행정명령 공포가 늦어진 점도 있지만, 단순한 행정 절차 문제가 아닌 국가 전반의 통제력 붕괴를 보여주는 신호라는 분석이다. 현재 수도 포르토프랭스는 ‘비브 앙삼(Viv Ansanm·공동 생활)’으로 불리는 ‘갱단 연합’이 장악하고 있다. 이들은 납치·살인·성폭력·방화·마약 거래 등 중범죄를 앞세운 공포 통치를 통해 사실상 ‘비국가 권력’으로 자리 잡은 상태다. 아이티 전체 인구의 약 12%인 140만명 이상이 갱단의 폭력을 피해 삶의 터전을 떠난 것으로 조사됐다.
갱단 연합의 상당수가 ‘소년갱’들로 채워져 있다는 점도 큰 문제다. 유니세프 등에 따르면 아이티 갱단 구성원의 약 절반이 아동으로 추정된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는 “최소 26개의 갱단이 포르토프랭스와 인근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이들 대부분이 아동 인신매매에 연루돼 있다”며 “갱단은 현물 지원, 정기적인 급여, 마약 등을 제공하면서 아동을 유인하고 특히 소속감과 사회적 인정 등을 갈구하는 취약 아동들을 집중적으로 노리고 있다”고 했다. 갱단에 팔려간 남아의 경우 폭력적인 ‘입단 의식’을 거치면서 점차 표적 살해·납치·성폭력 등 중범죄에 가담하도록 훈련되고, 여아는 성 착취·성노예화의 피해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2022년 이후 경찰이나 자경단에 의해 갱단 연루 혐의로 즉결 처형된 아동은 최소 36명에 달하고, 10세 아동들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아이티가 이처럼 ‘깡패 국가’로 전락한 건 2021년 7월 조브넬 모이즈 대통령 암살 사건이 결정적이었다. 당시 사저에 침입한 괴한에 의해 대통령이 피살되면서 권력 공백이 발생했고, 이후 정치 세력 간 극심한 갈등과 혼란이 이어졌다. 같은 해 규모 7.2의 강진이 겹치면서 국가 통제력은 급격히 약화됐다. 갱단들은 이 틈을 타 수도와 주요 기반시설을 장악하며 세력을 확대했다. 모이즈 대통령 이후 들어선 과도 정부들은 선거 실시를 공언했지만, 치안 불안 등을 이유로 번번이 일정을 미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