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에브리싱(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불리는 사우디아라비아 실권자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가 미국의 배후에서 이란 공격을 부추기고 있다고 뉴욕타임스(NYT)가 24일 보도했다. 빈살만은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통화에서 이번 전쟁이 “중동을 재편할 역사적 기회”라며 “이란의 강경파 정부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빈살만은 또 “이란은 걸프 지역에 장기적 위협이 되고 있으며, 이 문제는 이란의 현 정부를 제거해야만 해결된다”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란을 최대 안보 위협으로 인식하는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미국을 적극적으로 설득했다고 알려졌지만, 빈살만도 막후에서 미국을 강하게 압박했다는 것이다.
미국이 이란을 완전히 궤멸시키면 사우디가 중동 패권을 독점할 수 있다는 구상을 빈살만이 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빈살만은 대대적 확전으로 이어질 수 있는 지상전도 지지한다는 입장을 트럼프에게 밝혔다고 한다. 미국이 이란의 석유 산업 중심지인 하르그 섬을 점령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미군은 해병대에 이어 정예 공수부대도 투입한 상황이다.
◇“빈살만, 이란 ‘완전 제압’ 주문”
사우디 입장에선 미국이 이번 전쟁을 ‘어설프게’ 끝내고 이란과 합의할 경우 이란의 거센 보복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실제 이란은 개전 이후 사우디의 유전·정유소, 미국 대사관 등 주요 시설에 미사일·드론 공격을 퍼부었다. 이 공격으로 2명이 사망하고 10여 명이 다쳤다. 사우디 외무장관인 파이살 빈 파르한 알사우드 왕자는 이란에 대해 “조금이나마 존재했던 신뢰조차 완전히 산산조각 났다”고 했다.
사우디 정부는 “사우디 왕국은 이번 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평화적 해결을 항상 지지해 왔다”면서 ‘빈살만 배후설’을 일축했다. 그러나 빈살만은 지난달 미국이 중동에 군사력을 집결시킬 때부터 트럼프에게 “이번 기회에 이란을 공격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워싱턴포스트는 “빈살만은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함께 트럼프에게 가장 큰 전쟁 압박을 가한 인물”이라고 했다.
이번 전쟁으로 이란의 군사력이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고 사우디를 비롯한 중동 전반에 막대한 피해를 안길 수 있는 수준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빈살만은 이란이 다시는 이 같은 보복을 할 수 없도록 회복 불가능할 정도의 ‘완전 제압’을 트럼프에게 주문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빈살만과 트럼프의 ‘브로맨스’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는 지난해 4월 프란치스코 교황 장례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바티칸을 방문한 것을 제외하면, 집권 2기 정상 외교를 위한 첫 해외 순방으로 5월 중동을 방문했고 그 중에서 사우디를 가장 먼저 찾았다. 지난해 11월 백악관을 방문한 빈살만 역시 트럼프의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배경엔 수니·시아파 갈등도
같은 이슬람권이지만 사우디는 수니파, 이란은 시아파로 종파가 다르다. 민족·언어적으로도 사우디는 아랍 문화권에 속하지만 이란은 페르시아 문명에 뿌리를 두고 있다.
양국은 오스만투르크 제국 붕괴 이후 이슬람 세계의 종주국 자리를 두고 경쟁했다. 당초 미국을 비롯한 서방은 이슬람교 성지(聖地) 메카의 소재지이자 석유 산업 등 지정학적 이점을 갖춘 사우디를 맹주로 인정했다. 그러나 이란이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리고 반미·반서방 신정일치 공화국을 세우면서 구도가 달라졌다.
왕정 국가인 사우디는 왕정을 타파한 이란의 혁명 이념이 확산되는 것을 경계했다. 1987년 사우디 메카에서 반미 시위를 하던 이란의 시아파 순례자들이 사우디 보안군과 충돌해 400여 명이 사망하는 ‘메카 사건’이 발생했다. 이란 최고 지도자 호메이니는 “메카가 사악하고 불경스러운 수니파 이단자 무리의 손에 있다”며 사우디를 비난했고 양국 국교는 단절됐다.
이란은 반미 시아파 연대를 구축하며 사우디가 추구하는 질서를 뒤흔드는 전략을 구사했다. 헤즈볼라(레바논), 후티(예멘) 등 무장 세력과 이라크 내 시아파 민병대, 시리아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 등을 아우르는 반미 연합 ‘저항의 축’을 형성한 것이다. 사우디는 아랍에미리트(UAE), 바레인, 요르단, 이집트 등과 함께 수니파 연대로 맞섰다.
두 나라는 중동 안정이 필요할 때마다 전략적 제휴를 맺기도 한다. 2023년엔 7년간 단절된 국교를 재개했다. 당시 사우디는 빈살만이 주도하는 국가 개조 프로젝트 ‘비전 2030’을 진행하기 위해 국제 정세의 안정이 필요했고, 이란도 미국의 제재 장기화에 따라 숨통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번 전쟁으로 양국 간 데탕트(긴장 완화)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는 평가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