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대규모 정전으로 암흑에 잠긴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시민들이 오토바이 택시에 몸을 싣고 어둠 속을 이동하고 있다. 미국의 원유 봉쇄로 에너지 위기가 극도로 악화한 가운데, 쿠바에서는 이날 국가 전력망이 붕괴해 975만명의 시민이 전기없이 방치됐다. /로이터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압박으로 심각한 에너지난을 겪고 있는 쿠바가 16일 전 국가적 ‘블랙아웃’ 상태에 빠졌다. 쿠바 에너지광산부는 이날 “국가 전력망에 완전한 단절이 발생해 국영 전력청이 긴급 복구 작업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이번 단전 사태로 975만명 쿠바인이 사실상 전기 없이 생활을 영위해야 할 상황이라고 외신들은 전했다. 앞서 지난 14일 중부 도시 모론에서 정전과 식량 부족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쿠바의 유일 통치 세력인 공산당 건물 창문에 돌을 던지고 불을 지르는 사태가 일어났는데, 전력난이 해소되기는커녕 전국적 단전 사태로 번지고 있는 것이다.

쿠바는 지난 1월 중남미의 강성 반미·좌파 전선으로 굳건히 연대하던 베네수엘라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이 미국의 군사작전으로 축출된 뒤 전례없는 에너지 위기를 겪고 있다. 트럼프가 다음 ‘레짐 체인지’ 대상으로 쿠바를 지속적으로 겨냥하면서 베네수엘라산 원유의 대(對)쿠바 수출을 틀어막았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최근 기회가 될 때마다 “쿠바를 우호적으로 접수할 수 있다”고 공언해 왔는데, 쿠바의 위기가 지속될 경우 ‘우호적 접수 구상’이 윤곽을 드러낼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그는 이날 백악관에서 기자들에게 “나는 쿠바를 접수하는 영광을 누릴 것이라고 믿는다”며 “해방하든 차지하든 쿠바에 대해 내가 원하는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다”고 했다. 이어 “쿠바는 매우 잔혹한 지도자들의 폭정에 시달려 왔고 지금 매우 약해진 상태”라고 했다.

앞서 트럼프는 지난 1월 3일 마두로 부부 체포·압송 작전을 성공시킨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쿠바는 현재 실패하고 있는 나라이며 우리는 쿠바 국민을 돕고자 한다”며 쿠바 공산 정권이 마두로 다음 타깃이 될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후 발언 수위를 점차 높이면서 ‘쿠바 접수’까지 공언하고 있다.

쿠바를 향한 트럼프의 공세는 말에만 그치지 않았다. 마두로 축출 후 베네수엘라와의 석유 거래를 봉쇄한 데 이어 쿠바에 석유를 수출·제공하는 나라에 징벌적 관세를 부과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에도 서명했다. 북한·이란 등 적성국을 겨냥해 부과해 온 ‘세컨더리 보이콧’ 카드까지 꺼낸 것이다. 미국의 봉쇄가 본격화한 뒤 3개월에 접어들면서 쿠바는 태양광·천연가스 등에 의존해 전력을 생산해 왔지만, 노후화된 시설로 전기 수요를 감당하지 못했고 결국 전국적 단전 사태까지 일어난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현 쿠바 집권 공산 세력에 대해 “러시아의 최대 해외 신호 정보 수집 시설을 제공하고 (이란을 돕는 중동의 이슬람 무장 조직) 헤즈볼라와 하마스와 같은 초국가적 테러 단체에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하는 등 미국의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 “정치적 반대파를 박해하고 고문하며,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해 국민을 탄압하고 공산주의 이념을 확산시켜 혼란을 조장하고 있다”며 ‘정권 교체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집권 세력에 대한 압박과 별도로 국민을 위한 인도적 지원도 병행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허리케인이 강타해 큰 인명·재산 피해가 발생한 동부 지역 재건을 위해 지난 1~2월 두 차례에 걸쳐 900만달러(약 135억원) 규모의 인도적 지원을 진행했다. 이를 통해 쿠바인들에게 미국을 무능하고 억압적인 공산당 집권 세력을 대체할 대안으로 각인시키려는 의도도 담겨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트럼프가 현 집권 세력의 퇴진을 염두에 둔 구체적인 행보에 착수했다는 징후도 포착됐다. 트럼프 행정부는 최근 쿠바와 비밀 협상을 벌여 미겔 디아스카넬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했다고 뉴욕타임스(NYT)가 보도했다. 디아스카넬은 1959년 친미 정권을 축출하고 집권한 공산당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1959~2008년 집권)와 라울 카스트로(2008~2018년 집권)에 이은 세 번째 지도자다. 외형적으로는 카스트로 형제 이후의 새로운 지도자로 등장했지만 기존의 강경 반미·좌파 노선에서 벗어나지 않아 카스트로의 꼭두각시라는 평가도 적지 않다.

현재 쿠바계인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과 라울 카스트로의 손자 라울 기예르모 로드리게스 카스트로가 양국 간 물밑협상을 주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상황을 볼 때 미국이 카스트로 가문의 영향력은 용인한 채 내부적 정변을 유도해 친미세력으로 집권세력을 바꾸는 구상을 하고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NYT는 “트럼프 정부는 정권 교체(regime change)보다는 정권 순응(regime compliance)을 추구하고 있다”고 했다.

이 과정에서 과거 공산 정권의 탄압을 피해 탈출한 쿠바계 미국인 및 쿠바 국적자들이 모종의 역할을 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트럼프는 이날 기자들에게 ‘쿠바 접수 의지’를 밝히며 쿠바 출신 망명자들에 대해 “이들은 큰 부를 일궜고 영리하고 기업가 정신이 투철한데 많은 사람이 쿠바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망명자와 후손이 주축인 쿠바계 미국인 단체 미국 쿠바 재단의 호르헤 마스 대표는 미국의 대(對)쿠바 스페인어 방송인 TV마르티 인터뷰에서 “최근 트럼프 대통령 및 루비오 장관과 만나 쿠바의 민주화와 쿠바인에 대한 지원 방안 등을 논의했다”며 “올해는 ‘자유 쿠바’의 시작을 알리는 한 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수의 전문가는 트럼프의 쿠바 정권 교체 시도가 베네수엘라처럼 일사천리로 진행되긴 어렵다고 본다. 하상섭 국립외교원 교수는 “일당 공산주의 독재 체제인 쿠바의 이념·정치 모델은 (신정 체제인) 이란과 크게 다를 게 없다”며 “대안 세력 부재 상황에서 지도자만 교체하면 오히려 더 큰 수렁에 빠질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