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칠레 발파라이소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제41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 대통령(왼쪽부터)과 배우자 마리아 피아 아드리아솔라, 카리나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 비서실장,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이날 취임식에는 다니엘 노보아 에콰도르 대통령, 로드리고 파스 볼리비아 대통령 등 중남미 우파 지도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AFP 연합뉴스

11일 칠레 발파라이소 국회의사당에서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60) 대통령 취임식이 열렸다. 취임 선서를 마친 그는 내빈들의 박수를 받으면서 퇴장하다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과 환하게 웃으며 포옹했다. 다니엘 노보아(에콰도르), 산티아고 페냐(파라과이), 로드리고 파스(볼리비아), 나스리 아스푸라(온두라스), 호세 라울 물리노(파나마), 로드리고 차베스 로블레스(코스타리카) 등 다른 중남미 정상들과도 반갑게 인사했다.

이들은 지난 7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주최한 안보 협력체 ‘미주의 방패’ 창설 정상회의에 참석한 블루 타이드(중남미 우파 집권 세력) 멤버들로 나흘 만에 칠레에 다시 모였다. 미주의 방패 정상회의에서는 당선인 신분으로 초대됐던 카스트가 대통령으로 손님들을 맞았다.

카스트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군부 정권(1973~1990) 이래 가장 강경한 우파 성향 지도자로 꼽힌다. 불법 이민자 추방과 강력한 치안 등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워 ‘칠레의 트럼프’로도 불리며 보수 표심을 공략했고, 좌파 정권을 4년 만에 퇴진시켰다. 이날 취임식에는 베네수엘라 야권 지도자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 자이르 보우소나루 전 브라질 대통령의 아들 플라비우 보우소나루,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페루 대통령의 딸 케이코 후지모리 등 각국의 유력 정치인들까지 집결했다. 블루 타이드 현상이 거세지면서 새 정권 출범식이 중남미 우파 정상들이 모여서 세를 과시하는 축제의 장으로 활용되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칠레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 신임 대통령의 취임식이 열린 11일 수도 산티아고에서 지지자들이 칠레 국기 등을 든 채 환호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지난 2022년 10월 브라질 대선에서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전 대통령이 재선을 노리던 자이르 보우소나루 당시 대통령에게 승리하고 권좌에 복귀했다. 이를 계기로 아르헨티나·칠레·멕시코·콜롬비아·페루를 아우르는 중남미 주요 6국에 모두 좌파 정권이 들어서는 상황이 됐다. 핑크 타이드(중남미 좌파 집권 세력)의 전례 없는 전성기였다. 하지만 이듬해 11월 중남미 포퓰리즘의 본산 아르헨티나에서 밀레이가 당선되면서 핑크 타이드에 균열이 생겼다. ‘전기톱 퍼포먼스’를 보이며 강력한 정부 구조 조정에 팔을 걷어붙인 밀레이의 개혁이 성과를 내면서 정권이 안착했고, 밀레이와 밀착해온 트럼프가 재집권에 성공했다.

이를 전후해 중남미에서는 좌파정권이 우파로 교체되거나(온두라스·칠레 등), 기존 우파정권이 재창출에 성공하는(파라과이·코스타리카 등) 경우가 잇따랐다. MZ 세대 대통령이 과격한 범죄 소탕으로 높은 지지율을 구가하는 경우(엘살바도르·에콰도르)도 나왔다. 이런 흐름이 강해지면서 ‘핑크 타이드’와 대비되는 ‘블루 타이드’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블루 타이드’ 진영은 서반구(미주대륙)에서 미국 외의 열강 세력을 용납치 않겠다는 트럼프 2기의 돈로주의(도널드+먼로주의) 정책에 적극 부합하면서 초국가적으로 연대하고 있다.

/그래픽=양진경

좌파 정권 20년 통치를 종식시키고 지난해 11월 집권한 파스 볼리비아 대통령 취임식 때 밀레이·페냐·노보아 등이 참석하면서 본격 시작된 ‘연대 퍼포먼스’가 미주의 방패 정상회의와 칠레 대통령 취임식으로 이어지며 정례 행사로 굳어졌다는 평가도 나온다. 특히 이번 카스트 취임식의 경우 기존 블루 타이드 정상뿐 아니라 ‘대권 잠룡’들까지 대거 참석했다는 점이 주목받고 있다.

이들의 움직임이 향후 블루타이드의 흐름을 좌우할 가능성이 크다. 마차도는 지난 1월 미국이 군사작전으로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축출한 뒤 백악관에서 트럼프와 만나 자신이 받은 노벨평화상을 트럼프에게 선물했다. 시상자 측의 반발 속에서도 차기 권력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담은 장면으로 각인됐고, 이번에도 중남미 우파 정상과 나란히 참석해 존재감을 키우려 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현재 베네수엘라는 마두로 정권의 국정 2인자였던 델시 로드리게스 부통령이 트럼프의 용인하에 임시 대통령을 맡고 있다.

11일 칠레 발파라이소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 칠레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베네수엘라 야권 지도자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왼쪽)가 플라비우 보우소나루(오른쪽 남성) 브라질 상원의원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중남미 좌파 정권의 맏형 브라질 룰라 대통령의 정적(政敵)인 자이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의 아들이자 현직 상원의원인 플라비우 역시 밀레이 등 다른 중남미 정상들과 반갑게 인사하는 장면이 포착됐다. 플라비우는 오는 10월 대선에서 아버지를 대신해 룰라와 맞붙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페루를 10년간 통치했던 우파 알베르토 후지모리 대통령의 딸로 다음 달 대선에서 대권 도전 4수에 나선 케이코 후지모리 민중권력당 대표도 취임식에 참석했다. 페루는 2021년 7월 집권했던 강성 좌파 페드로 카스티요 대통령이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려다 1년 5개월 만에 축출된 후 잔여 임기를 채울 후임자들이 잇따라 단명했다. 새로 임기 5년을 채울 대통령 선거를 다음 달 치르는데 케이코는 여론조사에서 선두권을 유지하고 있다. 5월 콜롬비아 대선도 블루 타이드 확산의 중대 분기점으로 꼽힌다. 현재 좌파·우파 누구도 확실한 선두를 잡지 못하고 있다.

하상섭 국립외교원 교수는 “올해 페루·콜롬비아·브라질에서 우파가 집권하면 중남미 전역이 사실상 ‘친미·친트럼프’ 성향으로 재편되겠지만 ‘반발 심리’도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