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자본과 기술이 투입돼 홍콩과 칠레를 연결하는 2만㎞ 길이 해저 광케이블 가설 프로젝트가 미국과 중국 간 글로벌 패권 경쟁의 새로운 뇌관으로 떠오르고 있다. 중국 일대일로의 중남미 지역 핵심 프로젝트로도 꼽히던 이 사업 추진 단계에서 칠레가 좌파에서 우파로 정권이 바뀌자 미국이 사업 무산에 팔을 걷어붙였기 때문이다.
9일 AFP 등 외신들에 따르면, 11일 취임을 앞둔 우파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 칠레 대통령 당선인과 좌파 가브리엘 보리치 대통령은 최근 정권 이양을 논의하기 위해 가진 회동에서 거친 언쟁을 벌였다. 카스트가 “현 정부가 해저 광케이블과 관련한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고 있다”며 비난한 뒤 협력 중단을 선언했다. 이후 양측이 서로를 비난하며 정파 간 충돌로 확대되는 양상을 보였다. 카스트와 보리치는 양자 회동을 갖고 갈등 봉합에 나섰으나 해저 광케이블 문제가 칠레를 넘어 미·중 관계의 돌출 변수가 될 것이라는 관측은 힘을 받고 있다.
칠레는 2010년대부터 자국과 인도·태평양을 잇는 해저 광케이블 가설을 추진해왔다. 해저 광케이블은 전 세계 인터넷 트래픽의 90% 이상을 담당하는 핵심 통신 인프라다. 오랫동안 지지부진했던 프로젝트는 중국이 뛰어들며 급물살을 탔다. 중국 국영 통신 회사인 차이나모바일을 주축으로 한 컨소시엄이 5억달러(약 7457억5000만원)를 투입해 홍콩과 칠레의 태평양 연안 무역항 발파라이소를 잇는 2만㎞의 해저 광케이블을 가설·운영하는 사업 계획을 칠레 정부가 지난 1월 승인했다. 그러나 불과 이틀 뒤 칠레 정부가 ‘감사원 평가가 끝나지 않아 절차적 하자가 있다’며 승인 결정을 뒤집고 ‘평가 중’ 상태로 되돌렸다.
이어 지난달 20일 미국 국무부는 해저 광케이블 사업 총책임자인 후안 카를로스 무뇨스 교통통신부 장관 등 고위 관료 3명에 대해 본인과 가족에 대한 미국 비자를 박탈했다. 국무부는 이 제재에 대해 “서반구 핵심 통신 인프라를 훼손하고 지역 안보를 약화시키는 활동을 의도적으로 지시하거나 승인하고, 자금 등 중대한 지원을 제공했다”고 밝혔다. 이어 “이번 조치는 미국의 경제적 번영과 국가 안보 이익을 보호하겠다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의지를 재확인하는 것”이라며 “임기 말 보리치 정부가 지역 안보를 훼손해 칠레 국민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후 해저 광케이블 사업과 관련해 퇴임을 앞둔 좌파 대통령과 우파 대통령 당선인 간의 충돌로 이어졌다. 트럼프 행정부가 칠레의 정권 교체 시점에 맞춰 중국의 해저 광케이블 가설 계획을 완전히 무산시키고 칠레를 확고부동한 친미 국가로 줄 세우려 한다는 관측이 나온다.
미국은 중국이 세계 곳곳에 가설한 해저 광케이블을 활용해 각국의 정보를 수집하려 한다고 의심해왔다. 트럼프는 지난 7일 마이애미에서 열린 미국과 중남미의 군사·안보 협의체 ‘미주의 방패’ 창설 정상회의에도 현직 대통령 보리치 대신 당선인 신분의 카스트를 불렀다.
11일 칠레 우파 정부가 공식 출범하면 트럼프 행정부가 칠레와 중국 사이 희토류·광물 교역 체계도 손보려 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칠레는 세계 최대 구리 생산국이자 세계 2위 리튬 생산국인데 중국은 칠레산 광물 40%를 수입하는 최대 시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