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엘살바도르가 29일 상호 관세 협정에 서명했다. 당초 지난해 4월 미국이 각국에 대한 상호 관세율을 발표할 때 엘살바도르에 대해 10%를 적용했지만, 이번 협정문에서는 0%로 적시됐다. 나이브 부켈레 대통령은 발표문과 체결 사진을 자신의 X에 공유하면서 ‘서반구 최초의 상호 관세 협정’이라고 썼다. 한반도의 10분의 1 면적에 부산과 경남을 합친 정도의 인구를 가진 소국 엘살바도르가 캐나다·멕시코·브라질 등 큰 나라들을 제치고 중남미에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와 처음으로 관세 협상을 마무리했음을 과시한 것이다.
2019년 취임 후 7년째 ‘국가 비상사태’를 유지하며 범죄 조직 소탕 작전을 벌여 ‘조폭 잡는 대통령’으로 알려진 그가 트럼프와의 밀착을 통해 존재감을 높이고 있다. 전체 수출 시장에서 미국의 비율이 34%에 이르는 엘살바도르 입장에서는 ‘제로 관세’로 가격 경쟁력 면에서 상당한 혜택을 볼 전망이다. 불법 이민자 대규모 체포·추방 등 트럼프의 핵심 정책에 적극 협력해 준 부켈레를 위한 미국의 선물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블루타이드(중남미의 우파 정권) 지도자 중에서도 초강성으로 꼽히는 부켈레는 자신의 권력 기반이 된 강력 치안 정책을 활용해 트럼프와 밀착했다. 지난해 2월 미국에 “트럼프 행정부가 추방하는 불법 이민자들을 우리가 수용하겠다”고 제안했다. 자신의 지시로 건립된 초대형 범죄자 구금 시설을 미국에서 쫓겨난 불법 체류자와 범죄자 수용 공간으로 활용한다는 구상이었다. 트럼프가 반색하면서 구상은 현실화됐고, 불법 이민자와 중남미계 조폭 등이 대거 엘살바도르로 압송됐다.
지난해 4월 부켈레가 워싱턴 DC 백악관을 찾았을 때 트럼프는 J D 밴스 부통령과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까지 배석시키며 환대했다. 부켈레는 성전환자의 여성 스포츠 참여 금지 등 트럼프 행정부의 반 PC(정치적 올바름) 기조에 찬사를 쏟아냈고, 외신들은 두 사람의 관계를 ‘브로맨스’라고 표현했다.
지난해 7월 엘살바도르 의회가 대통령 임기를 6년으로 늘리고 연임 제한을 폐지하는 헌법 개정안을 확정하자 부켈레가 종신 독재자의 길을 걸으려 한다는 우려가 쏟아졌다. 그러나 미 국무부는 “엘살바도르 의회는 민주적으로 선출되었고, 국가의 통치 방식을 정하는 것은 그들의 몫”이라며 사실상 헌법 개정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부켈레가 범죄 소탕 작전으로 세계 최악 수준이던 엘살바도르 치안 상황을 크게 개선시키면서 지지율은 지금도 80%대를 유지하고 있다.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장기 집권을 꿈꾸는 부켈레를 위해 트럼프가 ‘꽃길’을 깔아줬다는 평가가 나왔다.
부켈레와 트럼프의 밀착은 지속되고 있다. 엘살바도르는 최근 트럼프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의 휴전 이후 평화 정착과 재건을 위해 출범시킨 ‘평화위원회’ 창설 멤버로 초청받았는데, 팔레스타인계인 부켈레는 흔쾌히 합류를 결정했다. 지난 19일에는 미국을 본뜬 국가조찬기도회가 엘살바도르에서 처음으로 개최됐는데 미국 연방의회의 기독교 신자 의원 14명도 참석했다.
트럼프라는 ‘뒷배’를 가진 부켈레의 영향력은 중남미 정세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다음 달 1일 치르는 코스타리카 대통령 선거에서 부켈레는 현 집권 우파 세력 재집권을 위한 특급 도우미 역할을 하고 있다. 다수의 중미 국가와 달리 오랫동안 정치·사회적 안정을 누려온 코스타리카는 최근 치안 상황 악화로 민심이 흉흉해졌고, 집권 우파 진영 라우라 페르난데스 후보는 대형 교도소 확충 등 부켈레식 치안 대책을 대거 공약했다.
부켈레는 코스타리카 방문 중이던 지난 14일 코스타리카 정부가 자국을 본떠 수도 산호세 외곽에 건설 중인 대형 교도소 건설 현장을 찾아 “우리가 했던 모든 것이 여기서 재현될 것”이라고 했다. 야당 후보들이 ‘외국 정상의 노골적 선거 개입’이라고 반발했지만, 페르난데스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결선투표 없이 당선을 확정할 수 있는 득표율인 40%를 거뜬히 넘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