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 쿠바 수도 아바나의 한 주유소 앞에서 급유를 기다리는 차들이 길게 줄을 서있다. 쿠바는 베네수엘라에서 원유를 저가로 공급받아 왔는데, 미국이 베네수엘라 연계 유조선들을 압류하면서 쿠바가 큰 타격을 받고 있다. /EPA 연합뉴스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쿠바의 원유 수입을 원천 차단하는 ‘해상 봉쇄’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베네수엘라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 축출 이후 중남미 반미(反美)·좌파 정권을 연쇄적으로 압박하는 미국의 전략이 쿠바로 향하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23일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트럼프 행정부 내부에서 쿠바의 정권 교체를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원유 수입을 막는 해상 봉쇄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아직 최종 결정은 내려지지 않았지만, 참모진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고할 선택지에 해당 방안이 포함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미국은 지난 3일 베네수엘라 작전에 앞서 카리브해에 해군 함정을 배치해 원유 운송로를 차단한 전력이 있으며, 현재도 이 일대에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쿠바 이민자 가정 출신으로 대(對)쿠바 강경론을 주도해온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과 쿠바 정권에 비판적인 행정부 인사들이 이 방안을 적극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뉴욕타임스는 루비오 에게 마두로 축출은 최종 목표인 ‘쿠바 정권 교체’로 가기 위한 중간 단계라고 분석한 바 있다.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미국 대통령과 미겔 디아스카넬 쿠바 대통령. /AFP 연합뉴스

앞서 트럼프는 연일 쿠바 정권이 외부 지원 없이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언급하며 쿠바를 압박하는 발언을 했다. 지난 8일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그는 “베네수엘라산 석유 없이 쿠바는 생존할 수 없다. 내 생각에 쿠바는 실패할 것 같다”면서 “쿠바를 돕기 위해 뭔가 해야 한다. (피델) 카스트로에게 너무도 끔찍하게 대우받은 미국 내 쿠바인들을 돕고 싶다”고 했다. 이어 지난 11일에는 “쿠바에는 더 이상 베네수엘라산 석유나 자금이 흘러가지 않을 것”이라며 “너무 늦기 전에 협상하길 강력히 권고한다”고 경고했다.

이 같은 움직임은 쿠바의 주요 원유 공급국인 멕시코에도 즉각적인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이날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대통령의 멕시코 정부가 쿠바에 대한 석유 공급을 제한하는 방안을 내부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에 따르면 멕시코 정부 고위 소식통들은 “쿠바에 대한 석유 공급을 지속할 경우 트럼프 행정부를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는 취지로 우려를 표했다.

멕시코는 그동안 계약 이행과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쿠바와의 교역을 유지해왔지만, 미국·멕시코·캐나다 협정(USMCA) 재검토 문제를 앞둔 상황에서 미국과의 관계 악화를 감수하기는 쉽지 않다는 분위기다. 대미 관계 관리가 국가 경제와 직결된 사안이기 때문이다. 다만 멕시코 정부가 최종적으로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아직 불투명하며, 공급 감축부터 전면 중단 또는 현행 유지까지 모든 선택지가 검토 대상에 올라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멕시코 대통령. /EPA 연합뉴스

에너지 자문업체 케이플러(Kpler)에 따르면 지난해 쿠바로 수출된 원유 가운데 멕시코산이 44%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베네수엘라(34%), 러시아(15%), 알제리(6%) 등이 뒤를 이었다. 과거 쿠바는 원유 공급을 베네수엘라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했지만, 미국 제재 등으로 지금은 30~40%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 때문에 베네수엘라발 원유가 막히고 멕시코마저 수출을 제한할 경우, 쿠바의 에너지 사정은 사실상 ‘마비’ 수준에 이를 가능성이 크다.

이미 수도 아바나를 포함한 쿠바 전역의 상황은 한계치에 이르렀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석유를 연료로 하는 화력발전소가 잇따라 가동을 멈추면서 아바나에서도 하루 4시간 안팎의 정전이 일상화됐다. 전력 불안정은 상수도 공급 차질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 주민 불편은 가중되고 있다. 연료 부족으로 쓰레기 수거 차량 운행이 중단되면서 도심 곳곳에 악취도 퍼지고 있다.

22일 쿠바 수도 아바나 모습. /EPA 연합뉴스

앞서 본지가 접족한 현지 교민은 “지방은 2~3시간 전기가 들어오면 다행인 수준”이라며 “코로나 시기 닭다리 하나를 사기 위해 8시간 줄을 섰던 때보다 지금이 더 힘들다는 말이 나온다”고 전했다. 그는 “현지인들은 소련 붕괴로 지원이 끊겼을 때보다 지금 상황이 더 심각하다고 말한다”고 덧붙였다.

베네수엘라에 이어 쿠바에 대한 압박 수위를 끌어올리는 미국의 전략이 실제 행동으로 이어질 경우, 카리브해를 둘러싼 지정학적 긴장은 한층 고조될 전망이다. 동시에 쿠바의 에너지 위기가 심화되면서 민생고(苦)가 악화되면 정권 안정성에 직결되는 변수가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단순한 경제난을 넘어, 에너지 위기가 항만 마비와 식량 고갈로 이어질 경우, 67년을 버텨온 공산 정권도 결국 생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쿠바는 1959년부터 이어진 공산당 지도자 피델·라울 카스트로의 ‘형제 통치’는 종식됐지만, 뒤이어 취임한 미겔 디아스카넬 정부 역시 반미·공산당 노선을 고수하고 있다. 디아스카넬은 최근 베네수엘라·러시아 인사 등과 접촉하며 미국을 규탄하는 발언을 반복해왔다.

지난 16일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미겔 디아스카넬(가운데) 대통령이 시민들과 함께 미국의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체포를 규탄하는 시위에 참석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