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수엘라 사태 이후, 쿠바는 언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풍전등화 분위기입니다.”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거주 중인 교민 A씨는 12일 본지 통화에서 “미군이 직접 쿠바에 상륙하지 않더라도 계속 목을 조여오며 쿠바 정권이 알아서 붕괴되기를 바라는 것 같다”고 현지의 위기감을 전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최근 베네수엘라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을 축출한 직후 “쿠바는 무너질 준비가 됐다”며 다음 표적으로 쿠바를 지목했다. 트럼프식 패권주의인 일명 ‘돈로 독트린’이 카리브해의 마지막 사회주의 보루, 아바나를 겨누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의 첫 타격은 석유였다. 베네수엘라에서 쿠바로 향하던 하루 3만 배럴 이상의 원유 공급을 차단하고, 이를 미국으로 돌리는 협상을 진행 중이다. 쿠바의 ‘산소호흡기’가 떼어진 셈이다. 과거 쿠바는 원유 공급을 베네수엘라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했다. 하지만 미국 제재 등으로 지금은 30~40% 수준으로 떨어졌고, 멕시코·러시아 등에서도 수입한다.
아바나 현지 상황은 이미 한계치다. 석유 기반 화력발전소가 전력 생산을 멈추면서 아바나조차 하루 4시간 정전이 일상화됐다. 전력 공급 불안정은 대개 상수도 공급 차질도 수반하는 경우가 많아 어려움은 가중된다. A씨는 “지방은 2~3시간 전기가 들어오면 다행”이라며 “코로나 때 닭다리 하나를 사려 8시간 줄을 섰던 기억이 생생한데, 올해는 그때보다 더 힘들다. 현지인들은 소련 붕괴로 지원이 끊겼을 때보다 지금이 더 심각하다고 한다”고 전했다.
기름이 없어 쓰레기 수거차가 멈춰 서면서 거리엔 악취가 진동하고 있다. A씨는 “여기서는 시위를 해도 ‘자유’ 같은 이념 구호가 아니라 ‘전기를 달라’ ‘빵을 달라’ ‘쓰레기 좀 치워달라’ 같은 생계형 시위”라며 “지금은 선선한 겨울이라 참지만, 전력 수요가 폭증하는 여름이 오면 민심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했다.
미국의 대(對)쿠바 압박 전략은 피델 카스트로 정권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쿠바 이민자 가정 출신의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이 주도했다. 뉴욕타임스는 “루비오에게 베네수엘라 마두로 제거는 최종 목표인 쿠바 정권 교체로 가기 위한 중간 단계”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당장 군사 개입 같은 물리적 충돌보다는 ‘고사(枯死) 작전’이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또다른 교민 B씨는 “쿠바엔 베네수엘라의 마차도 같은 강력한 야권 구심점이 없다”며 “그렇다고 현 정권에 국민들이 불만이 있다고 해서 그게 곧 미국 정부가 들어오는 걸 찬성한다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결국 미국 입장에서는 쿠바 국민들이 들고일어날 때까지 제재를 강화하려 할 것”이라고 했다. 현 정권의 대항마가 없는 상태에서 섣불리 개입하기보다, 경제적 질식을 통해 내부 붕괴를 유도한다는 것이다.
쿠바는 혈맹인 북한의 반발을 감수하면서까지 2024년 한국과 수교에 나섰는데, 이는 쿠바의 내부 사정이 그만큼 절박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해석이다. 지난 3일 미군의 마두로 체포 작전 당시, 그를 경호하던 쿠바 보안요원 32명이 사살되면서 양측의 감정은 이미 ‘준(準)전시’ 상태다. 미겔 디아스카넬 쿠바 대통령은 12일 “미국과의 대화는 없다”며 결사항전을 천명했다. 앞서 트럼프는 11일 “쿠바 경제는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쿠바에는 더 이상 베네수엘라산 석유나 자금이 흘러가지 않을 것”이라며 “너무 늦기 전에 협상하길 강력히 권고한다”고 최후통첩을 날렸다.
이주일 외교부 중남미국장은 “미국 입장에서 베네수엘라가 석유라는 경제적 이익이 있었다면, 쿠바는 정치적 상징성이 크다”며 “(트럼프와 루비오의 정치적 고향인) 플로리다의 쿠바계 강성 지지층도 의식을 안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국가안보전략을 통해 서반구 내 반미(反美) 세력을 뿌리 뽑겠다고 선언한 트럼프가 플로리다 코앞의 ‘눈엣가시’를 가만둘 수 없다는 것이다.
유성준 코트라 아바나 무역관장은 “미국에서 (다음은 쿠바라는) 그런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지만, 여기는 모두 정부 언론이고 사실상 언로(言路)가 막혀있다 보니까 현상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변화는 아직 없다”고 했다. 반면 외부에서는 이미 최악의 시나리오를 거론하고 있다. 블룸버그는 12일 아바나 주재 유럽 외교관들이 식량과 연료 공급망 파괴로 인한 ‘대혼란 속 체제 붕괴(Chaotic collapse)’ 가능성을 본국에 타전하고 있다고 전했다. 단순한 경제난을 넘어, 에너지 위기가 항만 마비와 식량 고갈로 이어질 경우 67년을 버텨온 공산 정권도 결국 생존하기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