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리고 파스(가운데) 볼리비아 대통령이 취임식이 열린 8일 수도 라파스 정부청사에서 자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배우자 마리아 엘레나 우르키디 여사 손을 잡고 국민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이날 5년 임기를 시작한 파스는 “이념은 결코 식탁에 음식을 올리지 못한다”며 시장경제와 자유주의에 기반한 실용주의 정책을 펼치겠다는 뜻을 밝혔다. /신화 연합뉴스

8일 볼리비아 수도 라파스 연방의회에서 열린 로드리고 파스(58) 신임 대통령 취임식은 최근 중남미에서 벌어지고 있는 ‘블루 타이드(blue tide·우파 세력이 대거 집권하는 현상)’ 흐름을 자축하는 현장이었다.

볼리비아가 20년 좌파 정권 시대를 마감하고 중도·우파 시대를 연 것을 축하하기 위해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 산티아고 페냐 파라과이 대통령, 다니엘 노보아 에콰도르 대통령 등 남미 주요 우파 정권 정상들은 직접 참석해 연대를 과시했다. 이들 셋은 서로를 포옹하며 반겼고, 나란히 앉아 밝은 표정으로 파스 대통령의 연설을 지켜봤다. 이날 취임식에는 온건 좌파 성향의 가브리엘 보리치 칠레 대통령과 야만두 오르시 우루과이 대통령도 모습을 드러냈지만, 반미(反美) 좌파 국가인 베네수엘라·쿠바·니카라과 정상들은 초청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8일 로드리고 파스 볼리비아 대통령 취임식장을 찾은 하비에르 밀레이(왼쪽부터) 아르헨티나 대통령, 산티아고 페냐 파라과이 대통령, 다니엘 노보아 에콰도르 대통령이 나란히 앉아있다. / 다니엘 노보아 인스타그램

주요 우군들이 대거 모여 힘을 실어준 가운데 파스 대통령은 이날 국민 통합을 상징하는 어깨띠를 두르고, 볼리비아 국기 배지를 착용한 채 연설을 했다. 그는 “우리가 받은 것은 왕좌가 아니라 임무”라면서 파탄 난 경제 재건과 반미 노선을 탈피한 실용 외교를 국정 핵심 과제로 제시했다.

볼리비아는 2006년 이후 첫 원주민 출신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 ‘모랄레스 충성파’ 루이스 아르세 등 좌파 대통령이 연달아 집권했다. 이 기간 중앙은행에서 달러가 바닥나 사실상 부도 상태에 이르렀고, 에너지·토지 국유화, 최저임금 대폭 인상 등 각종 포퓰리즘성 정책이 국가 경제를 초토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2023년 기준 볼리비아의 1인당 GDP(국내총생산)는 약 3700달러로, 남미 최하위권이다.

파스 대통령은 이날 “다시는 볼리비아가 ‘이념’에 인질로 잡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념은 결코 식탁에 음식을 올리지 못한다”면서 경제난 극복과 행정 효율성 강화를 위해 정부 부처 축소, 권한 분산, 민간 부문 성장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로드리고 파스(오른쪽) 볼리비아 대통령이 8일 취임식 직후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 대표로 온 크리스토퍼 란다우 국무부 부장관과 만나 악수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외교 정책에서는 미국과의 관계 복원을 최우선 과제로 삼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파스 대통령은 취임식 직후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 대표로 온 크리스토퍼 란다우 국무부 부장관과 곧바로 만나 17년간 단절됐던 대사급 외교 관계를 복원하기로 합의했다. 2008년 모랄레스 정부는 ‘내정 간섭’을 이유로 미국 대사와 마약단속국(DEA) 관계자 등을 내쫓았고, 미국도 ‘맞불’ 성격으로 자국에 주재하던 볼리비아 대사를 추방한 바 있다. 파스와 란다우 회동 이후 미 국무부는 보도자료를 통해 무역투자협의회 재가동, 항공편 증진 추진,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 치료제·검사 키트 기부 등 양국 협의 내용을 공개했다. 향후 볼리비아와의 협력을 강화하겠다는 트럼프 행정부의 방침을 보여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