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실시된 아르헨티나 의회 중간선거에서 우파 집권 여당인 자유전진당(LLA)이 좌파 페론주의(후안 페론 전 대통령이 주창했던 대중 영합적 정치 노선) 야권 세력에 예상 밖의 승리를 거뒀다. 내정 간섭 논란까지 감수하며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을 밀어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밀레이는 지난해 미국 대선에서 승리한 트럼프를 외국 정상 가운데 가장 먼저 만났을 정도로 친분이 각별하다. 트럼프는 또 ‘남미의 트럼프’ 밀레이가 이끄는 아르헨티나 정부가 좌파에 패배할 수 있다는 위기감에 밀레이를 지원해 왔다.
아르헨티나 선거 당국에 따르면, 이날 유권자 총 3570만명 중 2420만명(투표율 67%)이 참여한 상·하원 선거에서 자유전진당은 40.6%를 득표하며 승리했다. 반면 야권 페론주의 정당 연합은 24.3% 득표에 머물렀다. 자유전진당이 의회 다수당이 된 것은 아니지만, 하원(257석)의 최소 3분의 1이라는 목표는 여유 있게 달성할 것으로 평가된다. 정부 입법안에 대한 야권의 부결 시도를 막고 거부권 등을 행사할 수 있는 저지선이다. 상원에서도 여당이 전체 72석 중 20석 내외를 차지해, 주요 법안 협상 과정에서 영향력이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밀레이는 선거 직후 연설에서 “쇠퇴 대신 변화와 개혁을 추구해야 한다는 국가적 사명을 재확인한 것”이라며 “개혁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앞으로 중도 성향 군소 정당 의원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하겠다는 방침도 밝혔다.
이번 선거는 4년 임기 중반에 접어든 밀레이 정권에 대한 중간 평가 성격이 강했다. 사실 선거 직전까지도 밀레이 정부가 위기에 놓여 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페론주의적 포퓰리즘을 근절하겠다는 ‘전기톱 개혁’을 약속하며 2023년 취임한 밀레이는 재정적자 ‘제로(0)’를 위한 정부 규모 감축, 각종 보조금 축소 등 공격적인 긴축 정책을 추진해 왔다. ‘빌어먹을 자유 만세!’라는 구호를 앞세워 중앙 부처를 18곳에서 9곳으로 줄였고, 25%대까지 치솟았던 물가 상승률을 최근 2~3%대까지 낮췄다. 꾸준히 재정 흑자도 냈다.
그러나 복지 축소와 실업률 상승의 직격탄을 맞은 취약 계층을 중심으로 불만이 커졌고, 최근에는 밀레이 여동생의 입찰 개입 의혹 등 부패 스캔들까지 불거지며 ‘반(反)밀레이’ 정서가 확산했다. 아르헨티나 전체 인구의 약 40%가 거주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주에서 지난달 치른 지방선거는 밀레이의 참패였다.
현지 언론은 “여당의 놀라운 승리”라는 반응을 보이며 트럼프의 지원을 요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트럼프 미 행정부는 지난 9일 외환 위기를 겪고 있는 아르헨티나와 200억달러(약 28조5000억원) 규모의 통화 스와프 계약을 맺었다. 밀레이가 정치·경제적 위기에 몰리자 트럼프가 팔을 걷고 나선 것이다.
또 트럼프는 지난 14일 밀레이와의 백악관 정상회담 당시 참모들 앞에서 “우리는 다가오는 선거에서 밀레이를 지원하기 위해 여기 있다. 선거에서 패배하면 아르헨티나를 돕기 어렵다”고 말하며 밀레이 지지를 독려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이로 인해 아르헨티나에서는 이번 선거를 앞두고 “미국이 200억달러를 베팅한 선거”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경북 경주에서 열리는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를 앞두고 현재 아시아 순방 중인 트럼프는 27일 자신의 소셜미디어에서 밀레이의 승리를 축하하며 “그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아르헨티나 국민들로부터 확인받았다”고 적었다.
예상을 뒤집은 낙승을 두고 현지에서는 “포퓰리즘의 폐해에 지친 국민들이 ‘전기톱 개혁’을 일단 계속하라는 신호를 준 것”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아르헨티나 여론조사 기관 ‘수반 코르도바’의 구스타보 코르도바 대표는 로이터에 “이번 선거 결과는 과거 정부에서 유발한 경제 위기가 다시 닥칠 가능성에 대한 국민적 경계심이 반영된 것”이라고 했다.
하상섭 국립외교원 교수는 “아르헨티나 국민들 사이에서 밀레이 정부가 내세운 개혁을 계속 추진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여전히 강력하다는 뜻”이라며 “결국 물가를 비롯해 국민의 삶에 가장 중요한 민생 문제가 정부의 운명을 가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