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열린 브라질·중국 기업인 연례 회의 개막 연설에서 주칭차오 브라질 주재 중국 대사는 “일부 강대국이 패권과 자국 우선주의를 추구하고, 정글의 법칙으로 무역·관세전쟁을 조장해 국제 질서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정 나라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를 겨냥한 발언이었다.

이는 최근 불붙고 있는 중남미 내 미·중 패권 경쟁의 단면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20세기까지 ‘미국 뒷마당’으로 여겨져온 중남미에 중국이 진출하면서 시작된 두 나라 패권 싸움이 트럼프 2기 출범 이후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중남미가 인도·태평양 못지않은 미·중 갈등의 전선으로 떠오르는 양상이다.

그래픽=백형선

중국은 최근 중남미 최대 인구·영토·경제 대국 브라질을 적극 공략하고 있다. 좌파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대통령과 트럼프 관계가 벌어진 틈을 적극 파고들고 있다. 중국은 지난 8월 브라질 커피 업체 183곳에 대해 자국으로의 커피 수출을 승인했다. 트럼프가 자신과 각별한 자이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에 대한 룰라 정권의 사법 처리를 ‘마녀재판’이라고 비난하며 50%의 징벌적 관세를 물렸을 때 구원투수를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이후 중국은 대미(對美) 관세전쟁 수단으로 미국산 대두 수입을 끊어 트럼프에게 타격을 입힌 뒤 수입처를 브라질로 바꿨고, 여기에 브라질산 소고기·커피 등의 수입 물량까지 대폭 늘렸다.

중국은 아마존 열대우림을 품은 브라질의 기후 정책에도 동참하고 있다. 브라질이 조성을 추진 중인 1250억달러(약 178조원) 규모 산림 보존 기금에 일정 부분 보태겠다고 밝혔고, 다음 달 브라질에서 열리는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30)에서도 주최국을 전폭 지지하겠다고 했다. 트럼프가 주도하고 있는 반(反)기후 위기 정책과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룰라 정권의 도우미를 자처한 셈이다.

트럼프는 아르헨티나를 강력한 친미·친서방 국가로 전환시키고 있는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에 대한 전폭적 지원으로 응수하고 있다. 트럼프는 14일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밀레이와 정상회담을 갖고 선거 도우미를 자임했다. 트럼프는 “우리는 다가오는 선거에서 밀레이를 지원하기 위해 여기 있다. 선거에서 패배한다면 아르헨티나를 돕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왼쪽) 미국 대통령이 14일 백악관을 방문한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을 맞이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트럼프가 말한 ‘선거’는 26일 치르는 아르헨티나 의회 중간선거다. 2023년 12월 출범한 밀레이 정권 중간 평가 성격인 이 선거에서 집권 여당이 패배할 경우 정권이 동력을 잃고 반미·좌파 야당에 힘이 실릴 수 있는데 집권 여당은 여론조사에서 고전 중이다. 이런 점을 의식해 타국 내정간섭 논란을 무릅쓰고 트럼프가 강력 지지 의사를 밝힌 것이다. 트럼프는 앞서 지난 9일 200억달러(약 28조5000억원) 규모의 통화 스와프까지 승인했는데,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은 “우리는 중남미에서 또 다른 실패 국가나 중국이 주도하는 국가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해 이번 조치에 중국 견제 성격이 있음을 분명히 했다.

정치 혼란을 겪고 있거나 선거를 앞둔 중남미 국가에서의 미·중 패권 경쟁 가능성도 커지는 양상이다. 트럼프를 제치고 노벨평화상 수상자(야권 지도자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를 배출한 베네수엘라가 대표적 경우다. 트럼프는 지난 8월 베네수엘라를 통치하는 좌파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을 겨냥해 카리브해로 군함과 해군·해병대 병력을 배치했다. 마약 유입 단속이 명분이지만, 마두로 정권을 축출하고 베네수엘라를 중남미·카리브해 진출 교두보로 삼아온 중국에도 타격을 가하는 중장기 플랜을 세웠을 것이라는 분석이 적지 않다. 마두로는 집권 뒤 여러 차례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국가주석과 회담했고, 2023년에는 중국과의 관계를 ‘전천후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할 정도로 중국을 중시해왔다.

다음 달 대선 1차 투표를 앞두고 있는 칠레도 잠재적인 미·중 패권 경쟁 지역으로 꼽힌다. 칠레는 전기차 등 첨단 산업 핵심 원료인 리튬이 세계에서 가장 많이 매장돼있고, 가브리엘 보리치 대통령이 이끄는 현 좌파 정권은 리튬 산업 국유화를 추진해왔다. 그런데 최근 대선 여론조사에서 초강경 이민 정책과 강력한 공권력 행사 등을 주장해 ‘칠레의 트럼프’로 불려온 강경 우파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 후보가 선두권을 형성하고 있다. 이번 칠레 대선이 중국과 미국의 사실상 대리전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페루 초대형 항구 찬카이항의 모습. /신화 연합뉴스

최근 디나 볼루아르테 대통령 파면으로 7년 새 대통령이 다섯 번 바뀐 페루도 미·중 패권이 본격화할 가능성이 높은 곳으로 지목된다. 페루는 중남미의 중국 일대일로 사업의 핵심 지역이다. 중국 국영 해운사가 약 5조원을 투입해 태평양 연안에 초대형 항구 찬카이항을 완공해 지난해 11월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때 시진핑의 페루 방문에 맞춰 개항했다. 중국은 찬카이와 브라질의 대서양 연안 항구 일헤우스를 잇는 4500㎞ 대륙 횡단철도까지 구상했고, 미국은 중국의 페루 내 영향력 확대를 경계해왔다. 이에 따라 내년 4월로 예정된 페루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트럼프가 친미·반중 성향 후보를 지원할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하상섭 국립외교원 교수는 “이제 중남미를 ‘미국의 뒷마당’이 아니라 ‘미국과 용(龍·중국)의 뒷마당’으로 불러야 한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이 지역에서 두 나라의 패권 경쟁이 고착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중남미 국가들은 최근 미국이 압박을 하면 중국을 지렛대로 삼아 방어를 하고, 중국이 지나치게 밀어붙이면 미국을 끌어들이는 등 미·중 패권 경쟁을 활용하려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며 “양국 다툼으로 인한 반사 이익을 받는 측면도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