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중의원(하원) 선거에서 역사적인 압승을 거둔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미·중 패권 경쟁 시대에도 견딜 ‘강한 일본’ 미래상을 그리고 있다. 방산·반도체·조선·인공지능·원자력 등 일본의 장기 번영을 책임질 산업을 안보와 연계해 종합적인 미래전략을 만들고 집중 투자하겠다는 것이다. ‘미국 우선주의’의 미국과 대만 침공을 위협하는 중국 사이에서 믿을건 일본 스스로의 힘밖에 없다는 다카이치의 비전은 압도적 지지를 이끌어냈다.
9일 NHK 개표 집계에 따르면 8일 치러진 선거에서 집권 자민당은 전체 465석 가운데 316석을 확보, 개헌 발의선인 3분의 2(310석)를 넘었다. 1986년 나카소네 야스히로 정권의 304석보다 많은, 전후(戰後) 최대 의석이다. 연립여당 일본유신회(36석)와 합치면 352석으로, 전체 의석의 76%를 확보했다.
반면 야당인 중도개혁연합은 총선 전에 비해 의석수가 3분의 1 미만인 49석에 그쳤다. 다카이치를 견제할 정치 세력이 사실상 전무(全無)해진 것이다. 아사히신문은 “‘다카이치 1강’이라 부를 수 있는 정치 상황”이라며 “18일 소집 예정인 특별 국회에서 다카이치가 총리로 재지명될 예정”이라고 했다.
◇日 생존과 직결된 분야에 돈 쏟아붓는다… ‘사나에노믹스’ 본격 시동
다카이치 총리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자민당의 ‘책임있는 적극 재정’과 ‘안전보장 정책의 발본적 강화’에 국민이 신임을 줬다. 정부는 민간보다 한발 앞에서 대담한 투자를 추진하겠다”며 이른바 ‘사나에노믹스’의 시작을 선언했다. 경제안전보장상을 지낸 다카이치의 경제 정책은 디플레이션(경기침체)과 싸우기 위해 막대한 돈을 푼 ‘아베노믹스’와는 결이 다르다는 평가가 일본 전문가 사이에서 나온다. 국가 부채를 크게 문제 삼지 않고 돈을 쓰되, 일본의 생존과 직결되는 경제 안보 분야에 투자를 집중하자는 것이다.
◇“조선업은 국가 지탱 산업”
다카이치 총리의 조선업 재건 정책은 그가 그리는 산업·안보 결합 비전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다카이치는 조선업을 해상 운송 주권과 공급망 안정, 동맹 전략을 지탱하는 핵심 인프라로 재정의했다. 군함 제조 능력과 직결되는 조선업이 섬나라 일본에겐 수출 산업이기 이전에 반드시 자급해야할 안전보장 핵심 요소라는 것이다. 다카이치는 “조선업은 평시에는 경제를, 위기에는 국가를 지탱하는 산업”이라고 했다. 2035년까지 건조량을 두 배로 늘린다는 구체적 목표도 제시했다.
조선사 통합 촉진도 같은 맥락에서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달 일본 최대 조선 업체 이마바리조선은 2위 업체 재팬마린유나이티드(JMU)의 인수를 마무리해, 세계 4위권 생산규모를 갖췄다. 두 회사를 합치면 일본 내 점유율이 70%에 달하는데도 일본 정부는 예외적으로 독점금지법을 적용하지 않았다. 히가키 유키토 이마바리조선 사장은 “(일본의) 다른 조선회사를 모은 ‘올 재팬(All Japan)’ 전략으로 중국·한국에 대항하겠다”고 했다. 자민당은 조선업 지원을 위한 ‘1조엔(약 9조3500억원) 펀드’를 추진하고 있다.
◇”핵융합 상용화 앞당길 것”
자민당은 “에너지 수입국 탈피를 목표로 한다”는 공약도 제시했다. 한국·중국과 마찬가지로 막대한 석유를 수입하는 일본이 차세대혁신로와 핵융합 기술을 확립해 에너지 독립을 이루겠다는 것이다. 핵융합은 폭발 사고의 위험성이 거의 없고 폐기물도 없는 꿈의 기술이다. 헬리컬퓨전, 교토퓨지니어링 등 일본 스타트업들은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갖고 있다. 전문가들도 2040년대에야 상용화를 기대하지만 다카이치 정권은 핵융합 발전을 2030년대로 앞당긴다는 목표다.
희토류의 중국 의존 탈피도 진행 중이다. 일본의 배타적 경제수역인 미나미토리시마 인근 해역에서 희토류가 풍부한 진흙층이 발견된 것이다. 아직 경제성은 불투명하지만, 일본 정부는 ‘지정학적 위험성 회피’라는 가치를 우선하고 있다.
첨단 반도체 제조 공장을 일본 영토에 두려는 자민당의 꿈은 조만간 실현될 예정이다. 대만 반도체 기업 TSMC는 이달 초 일본 규슈의 구마모토현에 짓기로 한 제2공장에서 구형 반도체가 아니라 ‘3나노’ 최첨단 반도체를 생산하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대만과 한국, 미국에 이어 일본은 네번째 최첨단 반도체 공장 보유국 자리를 예약했다.
이는 다카이치의 친대만 정책에 대한 화답이란 평가가 나온다. 자민당 총선 공약에는 “중국의 도발적 행위에는 냉정하면서도 당당하게 대응한다. 대만해협의 평화와 안정은 중요하다”는 내용이 명기됐다. 일본 정부는 TSMC의 제2 공장에 7320억엔(약 6조8300억원)의 보조금을 주기로 했다.
◇살상무기 수출규제 철폐
일본의 한 방위 전문가는 “다카이치는 ‘무기 제조 능력이 없는 국가는 앞으로 동맹국 사이에서도 인정받지 못한다’는 인식을 가진 정치인”이라고 했다. 일본의 방산 산업은 1990년대초 냉전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업체수가 전성기의 4분의 1 이하로 쪼그라들었다. 좋은 무기를 만들어도, 수출 금지 탓에 자위대에만 팔아야하는 구조적 문제 때문이었다. 자민당 공약에는 “방위장비 이전의 운용 방침 5유형을 철폐한다”고 했다. 살상 무기의 수출을 막는 규정을 없앤다는 얘기다.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은 작년 8월 호주 해군에 프리깃함 11척을 공급한다고 발표했다. 여전히 세계 무대에서 통하는 일본 방산업체의 기술력을 입증한 것이다. 일본 정부는 아직은 수출 금지 대상인 함정이지만 완제품 판매가 아니라, 호주와 공동 개발이라고 해석하고 미쓰비시중공업의 수출을 허가했다. 일본 정부는 탄약 등 일부 군수공장을 국유화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