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총리실(총리관저)의 고위 관계자가 18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핵 무기를 보유해야 한다”고 발언해 파문이 커지고 있다. ‘비(非)보도’ ‘사견’을 전제로 한 발언이긴 했지만, 일본의 정권 관계자가 핵무장론을 언급한 건 이례적인 일이다. 세계 유일 피폭국 일본은 ‘핵을 갖지도, 만들지도, 들이지도 않는다’는 비핵 3원칙을 유지하고 있고, ‘핵무장’ ‘핵보유’는 금기어로 여겨진다. 강경보수 성향의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가 집권한 이후 ‘비핵 3원칙’에 이상 기류가 감지되는 가운데 나온 이 같은 발언은 단순한 실언이 아니라 다카이치 정권의 여론 떠보기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19일 마이니치신문에 따르면 다카이치 정부에서 안보 정책을 담당하는 고위 관계자는 전날 취재진에게 중국의 핵무기 확대와 러시아의 핵 위협, 북한의 핵 개발 등 주변국 위협을 지적한 뒤, “최후에 자신의 나라를 지키는 건 자기 자신”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안전 보장을 위해선 일본의 핵무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만, 이 관계자는 “비핵 3원칙을 수정하는 데는 매우 큰 폴리티컬 캐피털(정치적 자산)이 필요하다”며 “(당장은 어려워) 현실적으로는 미국 핵 우산의 보호를 받을 필요가 있다”고 했다. 핵무기를 “편의점에서 사 오는 것처럼 바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도 했다고 한다.
비핵 3원칙을 흔드는 이 발언이 알려지자 일본 내부에서도 비판이 일었다. 나카타니 겐 전 방위상은 “정부 입장에서 경솔한 개인 의견은 자제해야 한다. 괘씸한 생각”이라고 했다. 야당인 공명당의 사이토 데쓰오 대표는 “핵보유는 일본의 외교적 고립을 부를 뿐 아니라, 오히려 일본의 안전보장 환경을 극적으로 악화시킬 것”이라며 “(발언한 관계자를) 파면해야 한다”고 말했다. 작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일본 피폭자 단체 니혼히단쿄(일본 원수폭피해자단체협의회)는 “이 발언은 원폭피해자의 존재를 무시하고, 핵 전쟁을 용인하는 것”이라며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밝혔다.
파문이 커지자 기하라 미노루 관방장관은 이날 “정부는 비핵 3원칙을 견지하고 있다”며 진화에 나섰다. 하지만 일본에선 다카이치 정권이 ‘비핵 3원칙’의 변경을 추진한다는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있다. 강경 보수 지지층 사이에선 미국이 동북아 안보에서 손을 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대외 위협에 맞설 방위력을 스스로 갖춰야 한다는 주장이 팽배하다.
다카이치 총리도 취임 전엔 비핵 3원칙 가운데 ‘반입 금지 조항’을 바꾸자는 입장이었다. 미국 핵무기를 일본 영토에 반입·배치하자는 것이다. 취임 이후에도 국회에서 ‘비핵 3원칙의 견지’와 관련한 질문을 받곤 “내가 말할 단계가 아니다”라며 답변을 피했다. 다카이치 총리가 집권 자민당의 안보조사회에 ‘비핵 3원칙’의 재검토를 지시했다는 보도도 나오는 상황이다.
이날 발언한 총리관저의 안보담당 고위 관계자는 다카이치 총리와 같은 나라현 출신이라 측근으로 분류되는 인물인데다 자위대 출신으로 알려졌다. 당시 기자 간담회도 애초엔 ‘익명 보도 가능’이었다가, 발언 이후에 총리 관저에서 비보도를 요청했다고 한다. 여론의 반응을 보려는 의도적 발언이란 오해를 사기에 충분한 상황이었다.
대만 유사(전쟁 등 긴급사태)와 관련해 일본과 대립하는 중국은 당장 일본의 핵무장론을 비난했다. 중국 외교부 궈자쿤 보도 부국장은 기자회견에서 “일본의 일부가 핵보유라는 위험한 시도를 한다는 것이 노출됐다”며 “일본의 우익·보수 세력이 군국주의를 부활시켜, 국제 질서의 제한에서 벗어나 재군비화를 가속하려는 야심이 드러난 것”이라고 말했다. 또 “중국과 국제사회는 강하게 경계하고,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며 “일본은 역사를 반성하고 국제법과 헌법을 엄수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비핵 3원칙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고, 만들지도 않으며, 영토에 반입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일본의 원칙. 중국이 1964년 최초 핵실험을 단행하고 군사 긴장이 높아지던 때, 1967년 사토 에이사쿠 총리는 오히려 비핵 3원칙을 표명했다. 사토 총리는 1974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이는 일본의 평화 헌법과 전후 평화 국가 노선을 상징하는 기본 원칙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