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8일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한 공연에서 일본 가수 오쓰키 마키(52)는 만화 ‘원피스’ 주제곡을 부르던 도중에 쫓겨나듯 무대에서 내려가야 했다. 중국 관객들이 노래를 ‘떼창’으로 따라 부르는데 갑자기 배경 조명과 반주가 꺼졌다. 놀란 관객의 함성이 터졌고 당황한 오쓰키에게 행사 진행 요원 두 명이 다가와 무대 퇴장을 요청했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지난달 ‘대만 유사(有事·전쟁 등 긴급 사태) 시 자위대의 무력 개입’을 시사하는 발언을 한 이후 중국에서 예정됐던 일본 콘서트·영화·뮤지컬 등이 줄줄이 중단·취소·연기되고 있다. 중국 측은 구체적인 설명 없이 ‘불가항력’이라고만 하고 있다. 중국 정부가 일본과 문화 교류를 닫는 ‘한일령(限日令)’을 본격적으로 발효한 것으로 보인다. 2016년 주한미군 사드(THAAD) 배치 이후 한한령(限韓令)으로 한국을 압박한 것과 유사한 흐름이다.
중국은 일본 여행 자제령도 내린 상태인데,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지난 27일 기준 중국 항공사가 12월 운항 예정인 일본행 항공편 5548편 가운데 904편(약 16%)의 운항을 중단키로 했다고 전했다. 이 수치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日공연 주최측 “불가항력”… 中정부 개입한 듯
30일 일본 언론에 따르면 원피스 주제곡을 부른 오쓰키의 소속사는 당시 상황과 관련, “어쩔 수 없는 사정”이라고 했다. 이 공연의 주최 측은 이튿날 예정됐던 공연도 ‘불가항력’이란 이유로 취소했다. 일본의 대표 여자 가수인 하마사키 아유미(47)도 중국 콘서트인 ‘아시아아트 상하이 공연’이 갑자기 중지됐다고 28일 밝혔다. 당초 29일 예정된 행사였지만, 중국 주최사는 행사 전날 중국 소셜미디어 웨이보에 “불가항력의 원인”으로 중단한다고 했다. 하마사키는 인스타그램에 “일본과 중국인 스태프 200명이 5일 동안 밤낮없이 무대를 완성했지만 갑작스러운 요청으로 진행이 불가능해졌다”고 썼다. ‘불가항력’ ‘어쩔 수 없는 사정’은 사실상 중국 당국의 개입이 있었음을 시사한 것으로 해석된다.
중국 항저우와 베이징에서 열릴 예정이던 ‘미소녀 전사 세일러문’ 뮤지컬도 갑작스럽게 중지됐다. 일본 가수인 유즈, 피아니스트 우에하라 히로미의 중국 공연도 취소됐고, 일본 연예기획사인 요시모토흥업도 현재 준비 중인 중국 공연을 모두 중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극장 영화인 ‘일하는 세포’와 ‘짱구는 못 말려’도 개봉이 무기한 연기됐다.
문화뿐만 아니라 인적 교류도 사실상 단절 수순에 들어갔다. 지난달 일본 여행 자제령을 내린 중국은 후속 조치로 중국 항공사의 운항 편수를 줄이고 있다. 중국 항공사는 12월 운항 예정인 일본행 항공편 5548편 가운데 904편의 운항을 중단키로 했는데, 좌석 수로 따지면 총 15만6000개가 사라진 것이다. 후지이 나오키 나리타국제공항 사장은 “중국 항공사에서 감편 이야기가 계속 나오고 있다”고 했다. 앞으로 운항 중단 폭이 확대될 것이란 의미다. 중일 노선 항공권 가격은 급락해, 간사이~상하이 왕복 항공권은 작년의 절반 이하인 최저가 8500엔(약 8만원) 상품까지 등장했다.
일본 호텔·리조트에선 중국인 숙박 예약 취소가 급증하고 있다. 오사카관광국은 “오사카의 20개 호텔을 조사한 결과, 12월 중국인 숙박 예약 가운데 50~70% 정도가 취소된 것으로 보인다”고 발표했다.
중국은 2016년 사드(THAAD) 배치 당시, 우리나라를 압박한 ‘한한령(限韓令)’ 전략을 일본에도 똑같이 적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 외교부·문화여유부·교육부·주일 중국 대사관이 지난달 중순 이후 동시다발적으로 일본 여행·유학 경보를 내렸고 인민일보·신화통신·환구시보·CCTV 등 관영 매체는 군사전문가·학자들을 동원, 대일 비난 수위를 끌어올리고 있다.
중국 당국과 관영 매체가 표면적으론 ‘금지’와 같은 표현을 쓰지 않는 것도 한한령 때와 같다. 중국 정부 공지와 언론 보도 어디에도 일본 조치와 관련해 ‘금지(禁止)’나 ‘전면 중단(全面暂停)’이라는 표현은 등장하지 않는다. ‘자제(避免)’ ‘신중히 계획’ ‘위험을 평가하라’ 같은 문구만 반복된다. 마치 중국 국민이 자발적으로 동참하는 것처럼 포장하는 것이다. 사드 때는 중국은 한국이 아닌 뒤에 있던 미국을 겨냥했지만, 이번엔 일본을 직접 겨냥하고 있기 때문에 한일령 수위가 한한령보다 세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중·일 대립은 1년 이상 장기화할 가능성이 크다. ‘항일전쟁 승리 80년’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중국은 내부 정치·선전 측면에서 쉽게 물러서기 어렵다. 미국 외교 전문 매체 디플로맷은 최근 “중국은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기간 동안 다카이치 정권에 대한 압박을 멈추지 않기로 마음먹은 것 같다”고 분석했다. 다카이치가 1~2년 임기의 단명 총리로 끝날 것으로 보고, 그 기간 관계 악화는 감수할 수 있다는 계산이 섰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