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일본 여성 총리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가 등판했다. 100만 자민당 당원 총재에 오른 뒤, 곧 연립내각의 지지와 함께 차기 일본 총리에 선임될 전망이다. 다카이치는 고(故) 아베 신조의 아바타로, 아베노믹스와 군사력 강화, 헌법 개정과 천황 남성 계승을 주장하는 보수파 정치가다. 한국과 중국 미디어 대부분은 총재 당선 직후부터 ‘다카이치=야스쿠니신사 참배=극우 정치가’ 논리로 비난의 화살을 날리고 있다.
다카이치의 등장은 마침내 동아시아에도 ‘우향우’ 열기가 제도권 정치에 상륙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리버럴 올드 미디어의 일방 보도에 속아넘어가기 쉬운데, 미국은 물론 유럽 정치의 대세는 우향우 정치다. 가자지구 어린이 보호 시위가 전 세계에서 울려퍼지고 있다지만, 실제 더 큰 규모에다 더 많은 ‘반이민, 반다양성’ 시위가 열린다.
일본은 기본적으로 보수주의를 국체(國體)로 한 나라다. 전후 등장한 요시다 총리의 이른바 3대 독트린, 즉 ‘친미, 경무장, 경제중시’ 정책을 통해 생존해온 나라다. 그 같은 어제의 흔적을 이해한다면 새삼스럽게 ‘일본=극우’라 비난하기 어렵다.
야스쿠니신사 문제에 집착하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단 세 나라, 한국과 북한 그리고 중국이다. ‘극우=야스쿠니신사 참배’라는 단순한 정치관이 세 나라의 기저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조금만 각도를 틀어보면 다른 관점도 있다. 일본이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안 하는 대신, 다른 자국 우선주의 정책들을 한꺼번에 밀어붙일 수도 있다. 한국과 중국이 일본 정치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 스스로가 야스쿠니신사 문제를 협상 카드로 역이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다카이치는 일본에 밀려든 엄청난 과제들로 인해 밤잠을 설칠 정도라 말했다.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는 다카이치에게 닥친 아주 작은 이벤트에 불과할지 모른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핵심은 미래다. 다카이치의 등판과 함께 한·일, 미·일, 일·중 관계는 어떻게 변화해갈 것인가? 힌트는 다카이치 총재 당선 이틀 만에 축전을 보낸 트럼프의 메시지에서 찾을 수 있다. 자국우선주의 정치인들의 미·일 연대인 셈이다. 트럼프에게 있어 일본은 동아시아 나아가 인도·태평양 전선의 최고이자 최대 파트너라 볼 수 있다. 미국이 소유한 항공모함은 전부 11척으로 현역 가동 중인 항모는 3분의2 정도다. 그중 유일하게 해외에 배치된 항모는 USS 조지 워싱턴(CVN-73)이다. 고이즈미 신지로(小泉進次郞)의 선거구인 요코스카에 주둔한 제7함대 소속으로, 최첨단 비행기 90여대를 싣고 다닌다. 웬만한 나라 국방력 전부에 버금갈 파워다. 일본을 대하는 미국의 자세는 나토에 비길 정도로 깊고도 포괄적이다. 트럼프의 발빠른 축전은 그 같은 배경하에서 읽을 수 있는 당연한 결과다.
일본은 그동안 경무장 정책을 유지하며 군비증강에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트럼프 이후 세상이 요동치면서 이 같은 정책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현재 미국은 국방비 예산을 전체 GDP(국내총생산)의 5%로 올리라는 압력을 가하고 있다. 다카이치는 그 같은 압력을 피하지 않고, 국방비 대폭 증액을 정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더 이상 피하고 숨을 곳이 없다는 현실인식하에 첨단무기 제작에 적극 나설 것을 약속한다. 국민들은 다카이치의 생각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을까? 자민당 총재 경선과정에서 나타났지만, 일본인들의 정세관이 크게 변하고 있다. 다카이치의 우향우 정책과 향후 주변국과의 관계를 전망하면서 크게 세 가지 사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꽃사슴과 일본 세탁
이번 총재 경선을 통해 화제가 된 것은 1200여마리의 꽃사슴이다. 다카이치의 고향인 나라현의 상징으로, 총재 출마에 즈음한 연설에서 국민들에게 놀라운 사실 하나를 전한다. 외국인들이 꽃사슴들을 발로 차거나 뺨을 때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면서 당장 시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오래전부터 이미 인터넷에서 문제가 된 사안으로 주로 중국인에 의한 꽃사슴 학대를 거론한 것이다. 다카이치는 중국인이란 표현은 쓰지 않았다. 그러나 얘기를 듣는 순간, 대부분은 중국인의 동물학대 장면을 연상했다. 중국인뿐만 아니라 일본인에 의한 꽃사슴 학대도 있다는 얘기도 들렸지만, 인터넷 공간에서는 중국인의 비상식적 매너에 관한 규탄이 줄을 이었다. 중국인만이 아니라 한국인에 관한 얘기도 흘러나오면서 온라인에서의 의제를 다카이치가 점령했다.
최종 투표에 이르기 전까지만 해도 다카이치의 총재 당선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대부분의 레거시 미디어가 다카이치의 꽃사슴 발언을 차별적 언행이라 보면서 비판했기 때문이다. 신문·방송을 비롯한 레거시 미디어는 ‘차별주의자 다카이치’가 아닌 고이즈미를 응원하는 식으로 변해갔다. 그러나 다카이치는 뉴미디어 인터넷 공간을 독식하면서 지지자를 넓혀갔다. 꽃사슴 발언을 차별이 아닌 현실이라고 보면서 일본이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번 선거에서 드러난 보통 일본인의 정서라 볼 수 있다.
꽃사슴 발언을 종합해 보면 일본은 이미 ‘일본 퍼스트’로 접어든 나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 전역에서 넘치는 외국인 일탈 문제를 법으로 확실히 통제해야만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여론이다.
한국에서 보면 한층 더 헷갈릴 듯하지만, 리버럴 레거시 미디어는 ‘다카이치=극우 차별주의자’로 몰아가면서 다양성(Diversity), 형평성(Equity), 포용성(Inclusion)에 매달릴 것이다. 그러나 뉴미디어 인터넷 공간은 글로벌 시대 당시의 ‘우리 모두 함께 주의’ 주장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 극우정당인 참정당의 엄청난 비약은 올드 미디어의 한계를 체감할 최적의 증거다. 참정당이 ‘일본인 퍼스트’라고 한다면 다카이치는 ‘일본 퍼스트’가 정책의 근간이다.
한국에서는 트럼프조차 미국인들 정서에 반하는 폭군 정치가로 본다. 리버럴 레거시 미디어 보도만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연방군을 치안확보 인력으로 동원하는 과정에서 이를 반대하는 국민들과의 격돌이 거의 매일 벌어지고 있다. 민주주의 탄압이란 식의 기사가 넘치지만, 정작 범죄율이 급락하고 불법이민도 거의 근절됐다는 얘기는 보도되지 않는다. 급격한 방법이나 정책에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트럼프의 생각과 방향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정신이다.
다카이치는 총재 출마 연설에서 메이지유신의 주역인 사카모토 료마가 여동생에게 남긴 말 한마디를 인용한다. “일본을 지금 한 번 세탁해야만 한다(日本を今一度せんたく致し申候).” 꽃사슴 하나만이 아닌, 일본 전역에서의 새로운 세탁이 시작될 것이다. 뉴미디어 인터넷 공간은 이미 다카이치의 열도 세탁을 적극 지지하는 홍위병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미국 의회를 개척한 최초의 일본여성
다카이치는 필자가 공부한 마쓰시타정경숙 10년 선배다. 1984년 5기생으로 당시 유일한 여성이었다. 정경숙은 크게 두 파벌로 나눠진다. 창립자인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기수와 그렇지 않은 학생들이다. 필자가 입숙했던 1994년, 이미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저세상으로 간 상태였다. 정경숙은 1기에 5명 정도만 뽑는다. 지금은 2년제로 변했지만, 20세기까지만 해도 5년간 공부를 했다. 보통 1학년 때 기본 교양을 쌓은 뒤, 2학년부터는 자신의 테마를 찾아 필드로 나간다.
다카이치는 일찍부터 눈을 미국에 둔 인물이다. 1987년 하원의원 연구조사원으로 6개월 정도 워싱턴에 체류했다. 정경숙에서 워싱턴을 연구테마로 잡고 현지로 달려간 인물은 다카이치가 처음이다. 이후 정경숙 후배들이 줄을 이어 워싱턴에 갔지만, 대단한 모험정신을 가진 인물이라 볼 수 있다. 필자가 처음 워싱턴에 들른 것은 1999년이다. 워싱턴 곳곳에 다카이치 레거시가 표류했다. 안 좋은 소문도 많았다. 그러나 치안도 엉망이던 워싱턴에서 여성 혼자 돌아다녔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그러하듯 20대 첫 사회생활의 기억은 평생 남는다. 다카이치는 미국 워싱턴 생활을 사회 출발점으로 잡은 여성이다. 미국을 대하는 자세나 느낌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미국까지 공부하러 갔다가 반미 골수분자로 돌아오는 사람도 있지만, 필자가 아는 한 ‘반미 일본인’은 극히 드물다. 미국이 ‘최선’이 아니라는 것은 모두 다 알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나 중국과 비교해 보면 ‘최악’은 아니다.
일단 미국에 준할 자유로운 시장이 없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트럼프의 행적에서 보듯, 불편하고 불평등한 일들도 적지 않다. 아무리 그래도 중국이나 러시아보다는 미국이다. 국제정치 현장에서 국가 간 관계가 100% 평등해야만 한다는 생각 자체가 오산일지 모른다. 일본은 미국과의 군사 및 경제 전쟁에서 전부 패했다. 멀리는 태평양전쟁, 가까이는 1980년대 경제전쟁에서의 실패다. 그런 역사에 비하면 5500억달러 대미투자 약속은 그렇게 큰 변수가 될 수 없다. 다카이치는 대미투자 문제를 재론할 수 있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말하는 식의 ‘전부 아니면 전무’ 스타일의 극단적인 협상재개는 아닐 것이다. 미국을 이미 경험했고, 워싱턴을 이해하는 정치가라는 점에서 윤활유를 뿌리는 정도의 협상재개는 될 수 있다.
파벌을 초월한 범보수 여성 정책가
다카이치는 호르몬 조절 실패로 고생한 여성이다. 얼굴을 자세히 보면 뭔가 뒤틀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근에 완치됐다고 얘기를 들었지만, 사회생활을 거의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술도 멀리하고 회식도 거의 하지 않는 정치가다. 아베 파벌 소속이라고 하지만, 특별히 가까이 하는 정치가도 없다. 대신 혼자서 조용히 자신만의 정책에 주목하는 캐릭터다.
필자가 보면 다카이치는 정치가가 아니라 정책 전문가다. 자신이 직접 거느리는 파벌도 없기 때문에 아베 파벌들의 도움하에 일을 집행하는 실무형 리더가 될 수 있다. 총재 당선 직후 다카이치는 쉼없이 달리는 마차처럼 열심히 일하겠다고 말했다. 여성 특유의 구체적이고도 세심한 정책 개발도 이뤄질 것이다.
다카이치는 여성정치가란 표를 내지 않는 인물이다. 천황 법통도 여성이 아닌 남성만이 이어나가야 하고, 부부별성 문제도 부정적으로 대한다. 여성이지만 남성 중심 성별정책을 지지한다. 여성정치가라고 하면 반사이익을 노리는 ‘이미지 메이커’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남성에게 이용당하는 일회용이 아니라, 자신의 정책을 구체화해나가는 일본판 마거릿 대처로서의 역할이 다카이치에게 밀려든 과제이자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