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7일 일본 도쿄 총리 관저에서 긴급기자회견을 열고 사임의사를 발표하고 있다./EPA 연합뉴스

이시바 시게루(68) 일본 총리가 7일 총리 취임 11개월 만에 퇴임 의사를 공식 표명했다. 지난 7월 참의원(상원) 선거에서 패배한 뒤 자민당 내 책임론에 시달려온 이시바 총리는 그동안 여러 차례 정권 유지 방침을 밝혀왔으나, 결국 당이 소속 의원들에게 조기 총재 선거 실시 여부를 묻는 절차를 시작하기 직전 물러나는 길을 택했다. 자민당은 다음 달 후임 총재를 뽑을 예정이며 이르면 같은 달 국회에서 차기 총리 지명 선거가 치러질 것으로 보인다. 한국과의 관계에 우호적인 이시바 총리가 물러나면서 한일 관계에도 적잖은 파장이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차기 총리로는 강성 우파 성향인 다카이치 사나에 전 경제안보상과 고이즈미 신지로 농림수산상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이시바 총리는 7일 도쿄 총리 관저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많은 분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정말로 부끄럽다”며 “자민당 총재에서 물러나 다음 총재에게 자리를 넘기겠다”고 했다. 그는 “미국 관세 협상을 마무리한 지금,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질 적절한 시점”이라며 “어느 국가가 ‘그만둔다’는 정권과 진심으로 협상하겠는가. (총리직을 유지한 건) 국익을 위한 판단이었다”고도 했다. 미국과 관세 협상이 진행 중이라 사퇴 시점을 뒤로 미뤘다는 설명이다. 다만 그는 자민당 ‘비자금 스캔들’과 관련해 “국민 불신을 아직 불식하지 못했다”면서 “가장 마음에 걸린다”고도 했다. 이시바는 자민당 총재 선거와 직후 총리 지명 선거를 통해 새 총리가 탄생하면 총리직에서 물러날 것으로 보인다.

◇日 총리, 다카이치·고이즈미 누가 돼도 한일 관계 후퇴할 듯

이시바가 이날 사퇴 의사를 밝힌 것은 8일로 예정됐던 자민당의 ‘조기 총재 선거 여부 투표’ 때문이다. 사실상 이시바의 신임을 묻는 투표로, 과반수가 조기 총재 선거에 찬성하면, 이시바는 강제적으로 총재직과 총리에서 물러나는 상황이었다. 일본 현지 언론은 “당 소속 의원의 상당수가 찬성 입장을 공식화해 가결 가능성이 매우 높았던 상황”이라고 보도했다. 이시바가 강제 퇴진의 불명예를 피하기 위해 ‘미국 관세 합의’를 명분으로 스스로 퇴진을 선택했다는 얘기다. NHK는 “스가 요시히데 전 총리 등이 당의 분열을 막기 위해 이시바 총리에게 찬반 투표를 하기 전에 사퇴하라고 요청했고, 이시바 총리가 이를 받아들였다”고 전했다.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7일(현지시간) 일본 도쿄 총리관저에 도착하고 있다./교도 연합뉴스

이시바는 2024년 9월 말 3년 임기의 자민당 총재에 당선돼 같은 해 10월 총리에 취임했다. 하지만 이후 작년 10월 중의원(하원) 선거와 올 7월 참의원(상원) 선거에서 거푸 참패를 당했다. 자민당·공명당 연립 정권은 중·참의원 양쪽에서 과반수를 잃고 소수 여당으로 전락했다. 자민당이 1955년 출범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에 아소 다로 전 총리 등이 “이시바로는 자민당이 선거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게 입증됐다”며 퇴진을 요구해왔다.

여기에 이시바 정권은 출범 당시부터 당내 입지가 약한 비주류라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아베 신조 전 총리의 경우 100명 가까운 의원을 ‘아베파’로 두고 당을 장악했지만, 이시바 총리는 제대로 된 파벌조차 없는 정치인이었다. 정권 초기부터 옛 아베파나 아소파와 같은 강경 보수파는 이시바 정권을 끊임없이 견제했고, 잇단 선거 패배가 결정타가 된 것이다.

자민당의 후임 총재 선거에는 다카이치 사나에 전 경제안보상, 고이즈미 신지로 농림상,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 모테기 도시미쓰 전 간사장, 고바야시 다카유키 전 경제안보담당상 등이 출마할 것으로 보인다. 자민당·공명당 연립 여당은 국회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자민당 새 총재가 무조건 후임 총리가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야당도 분열해 있는 만큼 자민당이 총리직을 유지할 가능성은 여전히 크다. 마이니치신문이 최근 실시한 ‘차기 총리 선호도’ 여론조사에서 이시바 총리가 21%로 1위였고, 다카이치(14%)와 고이즈미(9%)가 뒤를 이었다. 4·5위는 야당인 국민민주당과 입헌민주당의 대표였고, 그다음이 하야시(2%)와 고바야시(2%)였다.

다카이치 사나에(왼쪽) 전 경제안보상과 고이즈미 신지로 농림상./교도 연합뉴스

이시바가 한일 관계 개선에 전향적인 입장을 보여온 만큼, 차기 총리가 누가 되더라도 한일 관계는 후퇴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시바 총리는 지난달 15일 ‘종전 80년 전몰자 기념식’에서 일본 총리로는 13년 만에 ‘전쟁의 반성’을 언급했고, 지난달 23일에는 이재명 대통령과 만나 미국과 협상 정보를 상세하게 제공하기도 했다. 그는 총리가 되기 전부터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에는 참배하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시바 총리는 이날 회견에서도 외교 성과를 언급하던 중 이재명 대통령과 결실 있는 회담을 했다며 “아시아 여러 나라와 연대해야 한다”고 했다.

반면 일본의 첫 여성 총리를 노리는 다카이치는 ‘여자 아베’로 불리는 강성 우파 정치인이다. 야스쿠니 신사에는 패전일과 춘·추계 예대제 등 매년 3차례 빠지지 않고 참배한다. 작년 자민당 총재 선거 때는 “총리가 돼도 (야스쿠니에) 참배하겠다”고 했고, 독도와 관련해 “한국이 더는 구조물을 못 만들게 하겠다”고 발언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 징용도 부정한다.

고이즈미 농림상은 비교적 한일 관계에 유연하긴 하지만, 이시바만큼은 아니라는 평가다. 44세인 고이즈미는 젊고 개혁적인 이미지와 대중적인 인지도를 가진 정치 명문가 출신으로, 부친이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다. 자민당 내부에는 ‘고이즈미팀’이 존재할 정도로, 당내 입지도 단단한 편이다. 하지만 지난달 15일엔 현직 각료임에도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했다. 후임 총재의 임기는 이시바의 잔여 임기인 2027년 9월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