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일본 영화 배급사 비터즈엔드가 유튜브에 공개한 영화 오펜하이머의 일본 개봉판 예고편/유튜브

원자폭탄을 개발한 미국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의 일생을 다룬 영화 ‘오펜하이머’가 지난 29일 일본에서 개봉했다. 지난해 7월 북미권에서 개봉한 지 8개월 만이다. 오펜하이머는 지난해 개봉과 동시에 유럽·중동·남미 등 전 세계적인 흥행을 거뒀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원자폭탄 피폭 당사국이었던 일본에선 개봉 여부를 놓고 반년 이상 논란이 일었다. 결국 ‘영화는 영화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돼 이날에야 뒤늦게 개봉했다.

미국 NBC는 이날 일본에서 오펜하이머가 개봉한 소식을 전하면서 “일본 관객들의 반응은 엇갈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도쿄의 한 영화관에서 오펜하이머를 관람한 일본인 남성은 NBC에 “훌륭한 영화였다”며 “이 영화가 다룬 주제는 일본인들에게도 큰 관심사”라고 했다. 다른 남성은 “오펜하이머의 내적 혼란을 묘사한 장면들을 보며 울컥했다”고 했다. 극중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개발한 원자폭탄이 일본 히로시마·나가사키에 투하된 후 전쟁을 끝냈다는 성취감과 함께 막대한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죄책감을 함께 느끼는 것으로 그려진다.

마에시마 가즈히로 도쿄 조치대 교수는 “핵무기의 정당성이 미국 정서를 지배한 수십 년간 할리우드에서 오펜하이머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탄생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며 “반전(反戰) 영화를 기대했다면 실망할 수 있겠지만, 이러한 미국 정서가 극적으로 변화했음을 보여주는 영화였다. ‘미국인의 양심’과도 같은 영화”라고 했다. 변호사 히로유키 신주도 “(미국인들이) 히로시마·나가사키에 대한 핵무기 사용의 정당성을 성찰하는 출발점”이라고 했다.

영화 ‘오펜하이머’의 한 장면/유니버설픽처스 코리아

반면 히라오카 다카시 전 히로시마 시장은 “히로시마 현민 입장에선 (영화에) 핵무기의 공포가 충분히 묘사되지 않았다”며 “원폭이 미국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사용됐다는 결론을 답습하는 방식이었다”고 했다. 영화 오펜하이머는 히로시마·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지는 장면이 직접 등장하지 않고, 이를 전후(前後)로 한 오펜하이머의 내적 갈등 위주로 전개된다. 요미우리신문은 이에 대해 “과학자로서의 목표와 애국자로서의 마음, 모순으로 가득 찬 휴머니스트로서의 갈등 등 주인공(오펜하이머)의 심경이 입체적으로 묘사됐다”고 했다.

일본 원폭피해자연합회 미마키 도시유키 회장도 “히로시마 폭격 장면이 나오길 기다렸는데, 결국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세 살 때 히로시마 원폭 투하에서 살아남았다는 미마키 회장은 “(영화를 보고) ‘일본인들은 진주만 공습을 감행하며 결코 이길 희망이 없는 전쟁을 일으킨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란 생각에 안타까웠다”며 복잡한 심경을 드러냈다.

미야모토 유키 미국 시카고 드폴대 윤리학과 교수는 31일 허프포스트재팬 인터뷰에서 “미국 사회엔 ‘원폭이 종전을 앞당김으로써 수십만 미국인과 일본인의 생명을 구했다’며 이를 정당화하는 정서가 깊숙이 뿌리내려 있다”며 “영화 오펜하이머를 계기로 핵무기의 비인도성이 미국인들에게도 인식됐으면 하는 바람이었지만, 일반 대중에게 이러한 인식을 침투시킬 정도로 메시지가 강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또 “영화엔 오펜하이머의 ‘양심 갈등’과 ‘죄의식’이 그려져 있다. 실제 피폭 지역인 히로시마·나가사키에 대한 묘사는 없이 가해 측 인간에게 ‘이런 죄의식에 시달렸구나’란 휴머니즘을 부여하는 게 정당할까. 단순 숫자와 집합적인 상징으로만 치부된 피해자들에겐 언제 인간성이 부여될 수 있을까”라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앞서 일본 영화 배급사 비터즈엔드는 지난해 12월 오펜하이머의 일본 내 개봉을 발표하면서 “본작이 다룬 주제는 우리 일본인들에게도 매우 중요하고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긴 논의 끝에 일본 개봉을 결정했다”고 했다. 요미우리는 이에 대해 “현명한 결정”이라며 “보고, 생각하고, 논의하는 것이 불가능한 사회가 되어선 안 된다. 영화를 보는 눈을 좁혀선 안 된다. 가장 피해야 할 건, ‘일본인은 어차피 안 본다’며 우리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행위”라고 했다.

영화 오펜하이머는 지난 11일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감독·남우주연·남우조연·촬영·편집·음악상 등 7관왕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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