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디지털 인재 육성을 위해 도쿄의 대학 정원 규제를 6년 만에 푼다. 2024년부터 도쿄대, 와세다대 등 도쿄 23구에 위치한 대학들이 디지털 계열 학부와 학과를 신설하거나 정원을 늘릴 경우 예외적으로 이를 허용하겠다는 것이다. 도쿄 23구는 도쿄도(東京都)에서 시부야·신주쿠·미나토구와 같은 도심 23구를 가리키는 행정구역으로, 우리나라의 서울특별시 25구와 같은 개념이다.
16일 교도통신에 따르면 기시다 내각 산하 ‘지식인 회의’는 이날 디지털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도쿄의 대학 정원 규제를 푸는 방안을 정부에 제안했다. 도쿄 23구에서 대학의 학부 신설과 정원 확대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지만, 이공 계열 학과에 대해서는 예외를 인정하자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지식인 회의의 제안을 수용, 법률과 제도를 정비해 2024학년도부터 시행할 방침이다. 이번에 늘린 정원은 일정 기간이 지난 뒤 원래 정원으로 되돌려야 한다는 제약을 뒀으나, 이는 획기적인 정책으로 평가된다. 일본은 2018년 지역대학진흥법을 실시, 10년간 도쿄 도심의 대학 정원 증가를 금지하도록 규정한 바 있다. 도쿄 인구 집중 현상을 해소하고, 지역의 쇠퇴와 지방 대학의 경영 악화를 막기 위해서였다.
그럼에도 이 같은 조치를 취하게 된 배경엔 디지털 인재 부족이 일본 경제의 가장 큰 리스크라는 위기의식이 깔려있다. 일본 경제산업성이 4년 전 실시한 디지털 인재 전망 조사에서 2030년 인공지능(AI) 업무와 데이터 분석, 기업 시스템 운영 등을 담당할 디지털 인재가 79만명 부족하다는 추산이 나왔다. 디지털 인재가 없으면 당장 ‘디지털 후진국’이라는 현실을 벗어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미래도 기약할 수 없다는 자성론이 나오면서 일본에선 다양한 인재 육성 방안이 나오기 시작했다.
올 초 일본 문부과학성은 앞으로 10년간 이공대 학부 250곳을 신설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국회는 추경 예산으로 3002억엔(약 2조9000억원)을 통과시켰다. 심사를 통과한 대학에는 최대 20억엔(약 190억원)의 보조금을 지원하기로 했다. 기존 학과와 학부를 첨단 기술학과로 전환해도 자금 지원 혜택을 누리도록 했다. 국립 구마모토대학은 내년에 반도체 인재를 육성하는 정보융합학부를 신설한다. 대만 반도체 기업 TSMC가 구마모토에 반도체 위탁 제조 공장을 짓기 시작하자 대학이 반도체 인재 육성의 전면에 나선 것이다. 입학 정원 60명으로 시작해 2032년에는 140명 규모로 늘릴 방침이다. 오가와 히사오 학장은 “100년에 한 번 오는 기회”라며 “이걸 잡기 위해 구마모토대학이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지방 대학에선 지난 6년간 첨단 디지털 학과 신설이 붐을 이뤄왔다. 2017년 시가현 시가대학에서 ‘데이터 사이언스 학부’가 처음 만들어진 이후 137개 대학에서 관련 학과를 신설했다. 총 입학 정원이 2만1600명에 달한다. 올 4월에는 추가로 17개 대학에서 디지털 학과가 출범한다.
이 과정에서 ‘도쿄의 벽(壁)’을 허물지 않고는 제대로 된 디지털 인재 육성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많았다. 도쿄 23구에는 일본 807개 대학 중 101곳이 소재하고 있다. 전체 입학 정원의 20%인 12만2000명이 몰려 있다. 하지만 정원 규제 탓에 도쿄 23구 대학들은 디지털 학과 신설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도쿄에 있는 사립대 릿쇼(立正)대학은 2021년 데이터사이언스학부를 신설했다. 150년 역사의 릿쇼대학은 법학·심리학과 같은 인문 계열 학과가 유명한데, 데이터 알고리즘과 프로그래밍·인공지능(AI)을 가르치는 디지털 학부를 신설한 것이다. 릿쇼대학은 기존 학부생 정원을 줄이는 고통을 감내하며 이 같은 변화를 강행했다. 요시카와 히로시 학장은 당시 니혼게이자이신문에 “21세기는 데이터 시대”라며 “일본에서 데이터를 다루는 인재가 부족하다면 이를 육성하는 게 대학의 책무”라고 말했다. 오는 4월에는 도쿄의 명문 국립대 히토쓰바시대학이 ‘소셜데이터사이언스 학부’를 신설한다.
요미우리신문은 “일본 정부가 이공대 인재 육성의 전면에 나선 것은 이번이 세 번째”라고 보도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군사적인 수요를 지원하기 위해 국립대에 공과대학을 확충했고, 고도 경제성장기에는 국공립 및 사립대에 이공계 대학생 2만명을 늘리는 계획을 추진했다. 한번 방향이 정해지면 사회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일본의 힘이 이번에도 다시 발휘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나오고 있다고 요미우리신문은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