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지상낙원’이라는 거짓 선전에 속아 북한에 건너가 수십년간 고초를 겪은 재일 교포 북송(北送) 사업 피해자들이 북한 정부를 대상으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패소했다. 다만 재판부는 북송 사업에 대한 북한 정부의 책임을 처음으로 일부 인정했다.
도쿄지방재판소는 23일 가와사키 에이코(80)씨 등 북송 사업 피해 탈북민 5명이 북한 정부를 상대로 총 5억엔(약 50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한 소송을 각하한다고 판결했다. 원고 측이 제기한 소송이 법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는 의미다. 소송 비용도 원고 측이 모두 부담하도록 했다.
가와사키씨 등은 1959년부터 1984년까지 일본에서 이뤄진 재일 교포 북송 사업을 북한 정부의 계획적인 납치·유괴 범죄로 규정하고, 2018년 12월 북한 정부에 책임을 묻는 소송을 제기했다. 그해 4월 북한에 억류됐다 사망한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의 부모가 미국에서 북한 정부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데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일본 내 차별과 가난을 피해 북한으로 건너간 재일 교포와 그 가족은 9만3000여 명에 이른다.
이번 재판의 쟁점은 국제법상 확립된 ‘주권 면제’ 원칙과 청구권 소멸시효였다. 주권 면제는 각국 주권이 평등해 한 국가가 다른 국가 법원에서 피고로 소송을 당할 수 없다는 원칙이다. 재판부는 이날 허위 선전에 대한 북한 책임을 인정했지만, “주권 면제가 적용되는 사안이 아니다”라고 명확히 판단했다. 북한은 일본이 정식 승인한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주권 면제 원칙도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재판부는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권리가 소멸됐다고 보고 소송 자체를 각하했다. 북한과 조총련의 거짓 선전에 속아 북한행을 택한 것은 46~48년 전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기간이 지났다는 것이다. 원고 측은 이를 우려해 북한이 출국을 금지하고 탈북 후에도 가족들과 만남을 방해하는 등 불법행위가 수십년간 지속됐다고 강조했지만, 재판부는 출국 방해 등이 일본 밖에서 벌어져 연속된 행위로 보기 어렵고, 일본 사법부의 관할권도 없다고 판단했다. 북한 정부 책임을 인정하면서도 손해배상 청구권은 소멸됐다는 결과에 일각에서 “북송 사업을 사실상 묵인한 일본 정부를 의식한 게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이날 재판부의 선고 직후 3년 넘게 소송을 주도해온 가와사키씨는 원고석 앞 책상에 얼굴을 묻고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이어진 기자회견에선 끝내 눈물을 보였다. 원고 측 변호인은 이번 재판에서 북송 사업에 대한 북한 정부의 책임이 처음으로 일부 인정된 점을 강조하며 항소 의사를 밝혔다. 북한 측은 이번 소송을 전면 무시하고 있다. 지난해 10월에 이어 이날 재판에서도 피고석 의자 3개는 텅 비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