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본은 ‘신규 비자 모라토리엄’ 상황이다. 직원을 일본에 파견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해외 기업들은 과연 일본이 장기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인지 의심하고 있다.” (크리스토퍼 라플레르 재일 미국상공회의소 특별고문)
“입학만 하고 입국 못 한 학생들은 시차 때문에 밤늦게 온라인 수업을 듣는다. 뱀파이어 같다고 한다. 장기적으로 일본에 기여할 수 있는 미래 인재 유입을 막는 일본이 걱정된다. 외국 유학생들은 점차 일본 대신 한국, 대만, 유럽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매슈 윌슨 미 템플대 일본 캠퍼스 총장)
9일 일본 도쿄 마루노우치의 일본외국인특파원협회에서 열린 기자회견. 이 자리에선 지난 2년간 외국인 신규 입국을 막아온 일본 정부에 대한 비판이 한 시간에 걸쳐 쏟아졌다. 재일 미국상공회의소, 유럽비즈니스위원회, 독일상공회의소와 미국 템플대 일본 캠퍼스 관계자가 참석한 이날 기자회견의 주제는 ‘일본의 발목을 잡는 엄격한 입국 통제’. 일본에 지사를 둔 외국 기업과 대학을 대표하는 이들은 “일본의 원칙 없는 입국 규제 정책이 일본의 미래 성장 가능성을 좀먹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이날 회견과 관련, “일본의 ‘코로나 쇄국(鎖國)’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고 있다”며 “중·장기 국제 경쟁력을 위한 ‘개국(開國)’이 시급하다”고 10일 보도했다.
21세기가 시작되고도 22년이 지난 시점에 일본에선 때아닌 쇄국·개국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일본 정부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 발생 초기인 2020년 상반기부터 시행 중인 ‘미즈기와(水際) 방역 정책’ 때문이다. ‘미즈기와’는 적이 육지에 도착하기 전 바다에서 섬멸한다는 군사 작전에서 유래한 말로 팬데믹 초반 코로나 발생국 외국인의 입국을 차단해 바이러스 일본 유입을 막겠다는 취지로 시행됐다. 이후 일본 내 지역사회 감염 방역으로 정책의 초점이 옮겨갔지만, 외국인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입국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오히려 2020년 말 델타 변이 발생 후엔 규제가 더욱 강화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2년 가까이 해외 기업이 일본 지사에 필요 인력을 제때 파견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 국내외 대학은 유학생 모집에 차질을 빚고 있다. 그러자 기업과 교육기관들이 거세게 반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NHK는 9일 메인 뉴스에서 “해외에서 입국 대기 중인 유학생이 약 14만5000명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이들 중 일부는 일본 입국을 기다리다가 미국 등 다른 나라로 선회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일 미국상공회의소 발표에 따르면, 입국을 못 하는 회원 기업의 직원은 적어도 150명으로, 가족까지 포함하면 수백 명이 일본 입국을 대기 중이다. 재일 독일상공회의소가 1월 하순 독일 기업 일본 지사를 상대로 실시한 조사에선 62%가 ‘향후 최대 1000만유로(약 137억원)의 손실이 예상된다’고 했고, 10%는 ‘일본 사업 축소 및 이전을 검토한다’고 답했다. 재일 미국상공회의소와 유럽비즈니스위원회는 2월 초 미즈기와 정책 철폐를 요구하는 성명도 공식 발표한 상태다.
일본 재계를 대표하는 경제단체연합회(게이단렌)와 일본상공회의소, 경제동우회, 신경제연맹 등은 코로나 쇄국 완화를 지난해부터 요구해왔다. 일본 언론도 비판적이다. 마이니치신문은 ‘레이와(令和·현재 일본의 연호) 쇄국 정책’으로,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코로나 방역 정책으로 합리성이 부족한, 일본의 국력과 매력을 훼손하는 쇄국 정책’이라고 비판한다. NHK는 9일 “일본은 더 이상 유학 선택지가 아니다” “평생을 일본 관련 연구에 바쳤지만 입국조차 하지 못한다”는 미국 학생들의 목소리를 전했다. 아사히는 10일 ‘코로나 쇄국’으로 외국인 기능실습생들의 출국이 막히면서 일본 지방 농업·건설 현장의 일자리 부족 문제가 심화한다고 했다.
하지만 일본의 일반 국민은 기시다 후미오 내각의 ‘코로나 쇄국’을 암묵적으로 지지하는 분위기다. 국경을 열면 해외 오미크론 변이 감염자가 더욱 유입돼 국민 건강을 위협한다는 것이다. 오미크론 변이 발견 직후 미즈기와 정책 강화를 단행한 기시다 총리의 결정을 89%가 ‘지지한다’고 답한 여론조사 결과(12월 6일 요미우리신문)가 발표되기도 했다. 일본 최대 포털사이트 야후에서 작년 12월 말까지 진행된 여론조사엔 총 18만5479명이 참가했는데, 이 중 91%가 “전 세계 외국인 입국 원칙적 정지 조치는 타당하다”고 했다. ‘타당하지 않다’는 7.5%에 그쳤다. 코로나 쇄국 정책을 비판해 온 일본의 한 일간지 기자는 “일본인들은 입국 제한 조치가 일본 사회에 장기적으로 피해를 가져온다는 인식 자체가 없다”며 “현실적으로 행정 당국의 입국자 방역 관리 역량이 한계에 달한 점도 규제 완화를 어렵게 하고 있다”고 했다.
일본의 현 입국 제한 정책 적용 기한은 2월 말까지로, 일본 정부는 조만간 완화 여부를 발표한다. 하지만 일본 국민의 이 같은 여론 때문에 미국과 유럽 국가의 코로나 정책 변화를 지켜본 후 ‘개국’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섬나라 일본은 ‘내향 지향’에 빠지기 쉽지만 그래봐야 정체할 뿐”이라며 “방역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상황에 따라 적절히 나라를 열어 외부 인력과 지식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