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 실시된 일본 중의원(465석) 총선거에서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신임 총리가 이끄는 자민당이 단독 과반(233석)을 확보했다고 NHK 방송이 보도했다. NHK는 이날 밤 11시 30분 자민당 의석이 수십 석 줄어들지만 단독 과반 확보에는 성공했다고 전했다. 요미우리신문은 자민당이 기존의 276석보다 34석 줄어든 242석을 확보할 것으로 예상했다.
자민당은 2012년 정권 탈환에 성공한 후 치러진 세 차례 총선에서 모두 단독 과반을 크게 웃도는 의석을 확보해 왔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는 입헌민주당을 비롯한 5개 야당이 단일화에 성공하면서 자민당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혔다. 공영방송 NHK는 출구조사 직후 “자민당 단독 과반수가 아슬아슬하다”고 했고, 니혼게이자이신문·마이니치신문·교도통신 등 유력 언론들도 개표 막판까지 자민당 단독 과반 여부에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자민당은 당 2인자로서 선거운동을 총괄한 아마리 아키라(甘利明) 간사장이 야당 단일 후보인 후토리 히데시(太栄志) 후보에게 밀려 지역구에서 패배하는 등 거물급 의원들이 고전했다. 아마리는 비례대표로 국회에 진출하더라도 간사장 직을 내놓을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단독 과반 확보에 성공한 기시다 총리는 첫 관문을 통과하며 한숨을 돌렸다는 평가다. 하지만 기시다 총리의 정권 기반이 안정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지난달 자민당 총재 선거,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자 급감 등 자민당에 유리한 요소가 많았음에도 과반 확보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고전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기시다 총리는 이날 저녁 긴장한 표정으로 “국민의 귀중한 신임을 받았다고 생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번 선거에서는 제1 야당 입헌민주당과 공산당 등 5개 야당이 전체 지역구 289곳 중 75%에 달하는 217곳에 단일 후보를 공천, 자민당 견제에 나섰다. 140곳에서 자민당 의원과 여야 양자 대결 구도를 만들었다. 자민당, 일본유신회, 야당 단일 후보 3자 대결 구도인 선거구도 69곳이었다. 그러자 자민당이 소선거구에서 40~50%의 득표를 하고도 야당 분열로 당선되는 이른바 ‘40대60 법칙’에 균열이 생기는 지역구가 생겼다. 경합 지역으로 분류되는 도쿄 등 대도시와 각 지방 도심 지역을 중심으로 어느 정도 세력 결집 효과를 낸 것이다.
덕분에 자민당에선 장관을 역임한 거물 의원들의 고전 소식이 줄을 이었다. 아마리 아키라 간사장이 출구조사에서 패배하는 것으로 나오자 지지통신은 자민당 간부를 인용해 “현직 간사장의 선거구 패배는 1955년 자민당 창당 이후 전례 없는 일”이라고 보도했다. 아마리 간사장은 굳은 표정으로 “선거구 패배 시 (나의) 인사 처분은 기시다 총리에게 맡기겠다”고 했다. 지난 9월까지 디지털청장이었던 히라이 다쿠야(平井卓也)와 올림픽장관을 역임한 사쿠라다 요시타카(櫻田義孝) 등도 야당 단일 후보에게 밀려 패배했다. 자민당 간사장 출신인 이시하라 노부테루(石原伸晃)는 도쿄8구에서 야당 단일 후보인 정치 신인에게 밀려 11선 실패가 확정됐다.
입헌민주당은 출구조사상 99~141석을 얻을 것으로 집계돼 NHK는 “의석수의 소폭 증가가 예상된다”고 했다. 공산당은 8~14석을 얻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후쿠야마 데쓰로(福山哲郎) 입헌민주당 간사장은 “야당 단일화는 일본 국민들에게 어느 정도 호응을 얻었다고 판단한다”고 했다. 시이 가즈오 공산당 위원장도 “이번엔 정권 교체엔 이르지 못했지만 내년 참의원 선거 등에 계속 도전하겠다”고 했다. 한편 오사카 지역을 중심으로 인기를 모은 극우 정당 일본유신회는 기존(11석)의 3배가 넘는 34~47석을 얻을 것으로 전망돼 공명당을 제치고 제3당으로 부상했다.
내년 7월 참의원 선거를 앞둔 기시다 총리의 정치 셈법은 더 복잡해질 전망이다. 당장 아마리 간사장의 거취가 문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기시다 총리는 이날 밤 “당 인사를 단행한 지 얼마 되지 않는다”며 “아마리 간사장의 인사 문제를 고려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하지만 자민당 창당 이래 처음으로 선거 전략을 총괄하는 간사장이 지역구에서 낙선, 인사 교체 요구가 거세질 전망이다.
자민당 선거 과정에서 기시다 새 총리가 아베 신조, 스가 요시히데 기존 정권과 차별화되는 국가 비전과 정책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도 지적된다. 외교·안보 정책은 아베·스가 전 내각의 노선을 그대로 계승, 자위대 명기 등의 개헌, 적 기지 공격 능력 보유 등을 당 공약으로 내세웠다. 기시다 총리는 경제 정책에서 차별화를 꾀하며 ‘새로운 자본주의’를 주장하고, ‘분배 없이 성장 없다’ ‘분배와 성장의 선순환’ 등의 구호를 외쳤다. 하지만 이 같은 분배 중시 노선이 야당 정책과 겹친다는 비판이 당 안팎에서 이어지자, 최근 연설에선 분배 키워드마저 점차 자취를 감췄다. 일본 마이니치신문은 최근 기시다의 가두 연설을 분석한 결과 “중의원 선거가 시작된 이후 기시다 총리의 분배·성장 언급 횟수의 균형이 붕괴됐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특히 아베 전 내각에서 정치 자금 문제로 낙마했던 아마리를 자민당 간사장 자리에 임명해 국민 반감을 산 것도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기시다 총리는 내년 7월 참의원 선거까지 최대한 지지율을 끌어올리며 단명 총리가 되는 것을 피하겠다는 전략이다. 만약 기시다 총리의 지지율이 하락하면 자민당 내에선 내년 참의원 선거 전 다시 ‘총재 교체’ 움직임이 일어날 수 있다. 자민당은 이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직전 총리 내각 지지율이 올림픽 폐막 직후인 지난 8월 29%(NHK 조사)로 급락하자, 스가 전 총리를 사실상 끌어내려 교체한 바 있다. “중의원 총선에서 최대 약 70석을 잃을 수 있다”는 비관론이 확산하며 당내 의원들이 동요하자, 스가 전 총리가 자진 사퇴 형식으로 물러난 것이다.
한·일 양국 관계에는 당분간 큰 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도쿄의 외교 소식통은 “당분간 자민당 내부 정치가 핵심 이슈가 돼 양국 관계는 내년 7월 참의원 선거 이후까지 주목받기 어려울 것”이라며 “자민당 단독 과반 성공과 기시다 총리의 리더십 안정이 한일 관계에는 나을 수 있다”고 봤다. 기시다 총리를 끌어내리려는 움직임이 확산할 경우, 당내 보수파가 지지하는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등이 후보로 대두돼 다시 ‘자민당 내 우경화’ 움직임이 강화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