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행정 디지털화를 위해 야심 차게 내세운 ‘부처 내 팩스 폐지’ 방침이 한 달 반 만에 좌초될 위기에 놓였다. 정부 부처 내에서 400건이 넘는 반론이 제기되는 등 반발이 크기 때문이다. 27일 요미우리신문은 이 같은 내용을 보도하며 “일본 정가의 뿌리 깊은 ‘팩스 문화’가 드러났다”고 전했다.

부처 내 팩스 폐지론은 지난 6월 고노 다로 행정·규제개혁상이 공식 제안했다. 지난해 9월 취임한 고노 개혁상은 ‘행정 디지털화’를 목표로 내걸고 정부 내 도장 문화 폐지를 추진해왔다. 일본의 관공서에서 도장이 필요한 공문서는 약 1만 건이었는데, “업무상 날인(捺印)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그 이유를 알려달라”며 강하게 밀어붙여 어느 정도 효과를 냈다. 그러자 두 번째 과제로 팩스를 겨냥하고 나선 것이다.

일러스트=김도원

고노 개혁상이 문제를 제기할 만큼 일본에는 여전히 팩스를 애용하는 문화가 뿌리 깊게 박혀 있다. 지난해 인구 2000만명이 넘는 도쿄도가 팩스 2대를 이용해 코로나 신규 확진자를 집계하다가 과부하로 확진자 통계가 엉망이 된 게 단적인 예다. 중앙 부처 공무원들의 재택근무를 방해하는 주범 역시 도장 외에도 팩스가 지목됐다. 이 때문에 고노 개혁상은 각 부처 공무원들에게 “타성에 젖어 팩스를 계속 이용하기보단 이메일을 사용하자”며 ‘이메일 소통’ 원칙을 제안했다.

고노 개혁상이 팩스 이용을 무조건 금지한 것도 아니다. 각 현업 부처의 의견을 수렴해 자연 재해 등의 비상 시기, 국민·사업자의 (서류) 접수, 보안 확보가 필요한 경우 등 5개 예외 조건도 인정해줬다. 이 외의 업무는 원칙적으로 팩스 대신 이메일을 쓰자는 것이다.

하지만 고노 개혁상의 발표 이후 한 달 반 만에 각 부처에선 400건 넘는 반론이 제출됐다. 반론 중에는 ‘이메일은 사이버 공격으로 인한 정보 유출 우려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해킹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메일보다 팩스를 사용하는 게 낫다는 황당한 이유다. ‘지방 파견 기관의 경우 통신 환경이 갖추어지지 않은 곳이 많다’는 것도 팩스가 필요한 이유로 거론됐다고 한다.

국회의원들이 여전히 팩스를 선호하는 것도 걸림돌이다. 정부 부처에 팩스로 질의하거나 자료를 요청하는 국회의원에게 공무원이 이메일로 하겠다고 대응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고노 개혁상은 최근 중의원과 참의원 운영위원회에 팩스 사용을 자제해달라고 협력을 요청했지만 아직은 효과가 불투명한 상황이라고 요미우리는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