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에 휩쓸린 중동의 작은 나라 레바논에서 이스라엘 공습에 따른 사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10일 레바논 보건부에 따르면, 이스라엘군의 최근 공습으로 300명 이상이 사망하고 1150명가량이 다쳤다. 이스라엘은 공습의 명분으로 친이란 무장 단체 헤즈볼라 격퇴를 내걸었지만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민간인 희생자도 상당수 발생했다고 현지 언론들은 전했다.
국가적 위기에서도 레바논의 대응은 무력한 모습이다. 조제프 아운 대통령과 나와프 살람 총리가 이스라엘의 공습 중단을 촉구하고 있고 국제사회가 규탄 성명을 내고 있지만 실질적인 조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1978년부터 남부 레바논에 주둔해 온 유엔 평화유지군도 임무가 휴전 감시와 완충 지대 유지에 국한돼 있어 이번 사태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면적은 경기도와 비슷한 레바논은 중동의 군사 강국 틈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특성 때문에 이 지역에서 크고 작은 전쟁이 발발할 때마다 나라 전체가 직격탄을 맞았다. 현재도 인구 590만명 중 120만명이 피란민일 정도다.
레바논의 이런 상황은 ‘예견된 비극’이라는 평가가 많다. 1943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할 때 지도자들은 기독교·이슬람을 아울러 18개 종파가 얽힌 권력을 어떻게 나눌지를 놓고 타협했다. 그 결과 인구 등을 고려해 대통령은 기독교, 총리는 이슬람 수니파, 국회의장은 이슬람 시아파가 맡는 ‘삼두 체제’가 만들어졌다. 미리 갈등·분열의 여지를 없애고 국가의 화합과 발전을 도모하자는 일종의 청사진이었다.
그러나 이런 시스템은 오히려 레바논의 족쇄가 됐다. 우선 주변의 강대국들이 개입해 만성적인 국정 혼란의 빌미를 제공했다. 이란은 시아파를 통해 친이란 세력을 주입시켜 지금의 헤즈볼라를 키웠다. 수니파는 사우디아라비아 등 아랍권, 기독교는 이스라엘의 입김에 휘둘렸다. 그 결과 레바논의 내정은 주변 국가들의 패권 다툼에 휩쓸리면서 국가 기능이 반복적으로 마비됐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2022년 10월부터 2년 2개월 동안 지속된 대통령 공백 사태다. 대통령을 선출하는 의회에서 후보마다 지지 파벌이 갈려 표결을 거듭해도 정족수를 채우지 못해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 공백이 이어졌다. 2020년 8월에는 수도 베이루트 항만에서 초대형 폭발 사고가 일어나 100여 명이 숨지고 기간 시설이 파괴됐다. 인화성 물질인 질산암모늄이 수년째 방치되면서 대규모 참사로 이어진 이 사고 역시 정파 간 이합집산에 매몰돼 국가 기능이 마비된 상황에서 벌어진 인재로 꼽힌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수도 베이루트가 ‘중동의 파리’로 불릴 정도로 레바논은 서구화된 나라였다. 1956년 예금주와 계좌 정보를 비공개하는 은행 비밀법 제정 후 산유국 자본이 몰리면서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6%에 달했다. 하지만 1970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레바논 남부에 정착하고 아랍 국가들과 이스라엘 간 무력 충돌이 전개되면서 사실상 만성적 전시 상태로 접어들었다.
이런 혼란 속에서 친이란 무장 단체 헤즈볼라의 영향력은 기존 정부의 역량을 뛰어넘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80년대 이스라엘에 저항하는 시아파 민병대로 출발한 헤즈볼라는 이란 혁명수비대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 세력을 키웠고, 지금은 의석까지 확보한 유력 정당이다. 동시에 미국 등 서방에 의해 테러 조직으로도 지정돼 있다. 지정학적 환경과 정치 체계, 헤즈볼라의 영향력까지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레바논의 상황에 근본적 변화가 없는 한 수난이 되풀이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